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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기사승인 2021.04.07  15:47:05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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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은 대표작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1813)에서 오만한 사람은 편견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어느 소읍에 다시(Darcy)라는 돈 많은 런던 청년이 근처에 별장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진다. 그러자 그곳에 사는 어머니 중에 과년한 딸이 있는 사람은 그 총각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는다. 그러던 중에 그곳에 큰 무도회가 열리고 그 청년이 그 무도회에 온다고 하자 엘리사벳의 어머니도 딸들을 데리고 무도회에 참석한다. 

그런데 다시는 같이 온 친구들과 어울려서 춤을 출 뿐 시골 처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자 그 청년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시골 어머니들은 이 오만한 런던 청년에게 실망한다. 

다시는 시골 처녀 엘리자벳이 그의 누이들보다도 더 재치있고 총명하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의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청혼하기에 이른다. 다시가 우여곡절 끝에 엘리사벳과 결혼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는 그의 오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런던에 사는 오만한 다시가 시골 처녀 엘리사벳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멸시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사는 오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에 사는 예수님을 멸시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91km 떨어져 있고 해발 375m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산골 마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라고 혹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 7:41)라고 말했다.

다시는 처음에 엘리사벳에 대한 편견을 가졌으나 나중에 자기의 편견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선민의식으로 의해서 오만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행 24:5)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발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유대인이 가진 선민의식의 희생자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의식

오만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 보여주듯, 우리의 일상에서 문제가 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더욱 문제가 된다. 오만으로 인해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교회에서 경계하는 일곱 가지 대죄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오만이다. 그리고 천사장 루시퍼가 사탄이 된 것은 그가 오만해져서 하나님과 대결할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오만은 죄를 낳지만 겸손은 사랑의 통로가 된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겸손의 본을 보이신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느니라”(요 13:14-15) 

예수님이 이렇게 겸손을 강조하신 것은 겸손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만한 사람은 이웃을 경멸한다.

어느 민족보다 선민의식이 강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민족을 경멸하고 적대시했다. 그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에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그들의 진로를 막는 모든 부족을 악의 세력으로 간주하여 무참하게 살해했다. 어떤 때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어린아이까지 도륙했고, 시체의 목을 베어서 나무에 걸어놓기도 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여호수아로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웃 나라와 싸운 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대자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도륙한 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 것은 전쟁을 통해서 그의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선민의식의 허점을 발견하게 된다.

선민의식을 이어받은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박해했다.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그들과 같은 민족에서 갈라져 나간 북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인들과 살면서 혼혈이 이루어지자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해서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성전을 파괴하기도 했다.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뿐 아니라 때로는 동족도 멸시했다. 런던에 사는 다시가 시골 처녀 엘리사벳을 경멸한 것처럼, 서울 사람이 지방 사람을 깔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서울 사람의 오만에 종교적 선민의식이 더해지면 그들의 오만과 편견은 배가된다.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영적 능력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한 것은 그들의 선민의식으로 인한 독선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의식의 희생자였다.

이렇게 선민의식의 희생자였던 예수님은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오만해져서 이웃을 경멸하고 갈등과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꿰뚫어 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의 범위를 동족을 뛰어넘어서 타민족에게까지 확대하시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기독교인의 선민의식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기들만이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참혹한 종교전쟁을 일으켰다. 11-13세기 동안에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인들이 이스마엘의 자손을 악의 세력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의 자손인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지만,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의 자손인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버리시지 않았다. 사라의 질투로 인해서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3)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헤매다가 물이 떨어져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하갈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물을 주시면서 하갈에게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3:18)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창 23:20) 계셨다. 이스마엘을 축복하시고 그를 도우신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자손도 사랑하실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예정해 놓으셨다는 예정론을 주장했다. 이 예정론에 따라서 개신교인들은 자기들은 구원받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신념을 가졌고 자기들의 교리만이 절대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정론은 개신교식의 선민의식을 조장했다. 이 선민의식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다. 칼빈의 목회지 제네바에서 이단의 추방과 처형이 빈번히 일어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7세기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일어난 참혹한 30년 전쟁의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의 선민의식이었다. 양측은 자기들이 내세운 교리만이 옳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네 편이라고 믿고 유럽을 피바다로 만든 전쟁을 자행했다. 하나님은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이는 양측 중 어느 편의 기도도 들어주실 수 없었을 것이다.

선민의식이 강한 예정론자들이 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배타적인 그들은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미국의 원주민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간주해서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잔혹한 마녀사냥을 일삼았다. 선민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호주에 들어가서도 원주민들을 사냥했다. 그들은 호주의 남쪽에 있는 테즈메니아섬에서 어린아이까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원주민들을 죽였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은 원주민들을 사랑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원주민들에게 그 땅을 주셨고 백인들은 침입자였다. 기독교인들의 원주민 살해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그들의 진행을 방해하는 부족들을 악랄하게 살해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미국 기독교인들의 후예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와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과 함께 선민의식을 심었다. 선교사들이 선교 초기에 한국의 토속 신앙이나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적인 습속을 지키지 못하게 한 것은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은 가톨릭에 대해서도 각을 세우고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가톨릭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17세기에 일어났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30년 전쟁의 잔재이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한국의 주류 종교가 된 지금, 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좀 더 융화적일 만한 때가 되었다. 그러나 특히 개신교가 가톨릭에 대해서 여전히 각을 세우고 있다. 그런가 하면 누구에게나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기독교가 한국의 국교인 것처럼 타종교에 대해서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은 아주 심한데. 이것은 선민의식으로 인해서 일어난 십자군 전쟁을 상기시킨다.  

선민의식은 흔히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데, 그 잔재를 개신교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경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서, 어떤 때는 주도권을 잡으려는 욕심 때문에 교단이 분리되고 교단 안에 분파가 생기는 것은 실상 자기만이 옳다고 하는 선민의식의 발로이다. 한국 교인의 분파의식은 아주 심해서 지금 장로 교단 안에 80개 이상의 분파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보통 기독교인은 사회생활에서도 비타협적이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비타협적인 태도 역시 선민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마치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장에서는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멸시하고 미워하는 유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원수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5)라고 말씀하셨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은 화평, 원수 사랑, 그리고 인자와 자비를 하나님의 아들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자기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옳다는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서 갈등과 분쟁을 일삼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거나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하거나 무자비하게 죽였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판별하시는 기준이 화평, 원수 사랑, 그리고 인자와 자비이이기 때문에,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을 가릴 것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할 것 같다.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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