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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현숙 옮김, 복 있는 사람, 2016)
어느 시대나 큰 정신들의 특징 중 하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겨운 시절을 살아냈으면서도 자기 연민과 비탄에 빠지지 않고 고통의 현실을 과장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격랑 속에서도 초월적인 시각과 순교자의 용기로 보이지 않는 희망을 길어 올려 당대와 후세의 공동체에 감동과 유익을 준다.
독일의 목사이며 신학자, 교수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성도의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이 출간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세 살이었던 1939년이었다. 때는 2차 세계대전 발발(1939년 9월 1일)과 맞물려있다. 히틀러가 독일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민족의 구세주로 추앙받던 시절, 신앙 양심에 따라 나치와 히틀러에 맞서 목소리를 내다가 발언 금지 조치를 당하고,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감시 끝에 체포당한다. 전운이 감도는 불안한 시대와 전시(戰時)를 살았고, 한 인격을 압살하려드는 전체주의 국가 폭력 앞에서 백기 투항 하지 않았다. 2년 동안의 수감-이송-불법적 즉결재판을 거쳐 39살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한 비극적 최후였지만 그는 끝까지 부활을 믿었다. “이로써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그의 유언이다.
그의 생애를 생각하며 거침없는 투쟁가와 혁명가로 생각한다면 본회퍼의 저술은 뜻밖이다. 그의 저술에서는 비장함이나 과격함 대신 진리이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묵시 종말적 희망이 뚝뚝 묻어나온다. 짧은 사설로 어찌 한 자락이라도 소개할 수 있겠냐는 의심이 앞서지만 명산에 오르는 초보 등산객의 심정으로 본회퍼의 글을 천천히 더듬어 읽는다.
‘응당 그래야할 것’이라는 경계가 사라진 새로운 일상에서 지금껏 그래왔다고 해서 당연한 것은 없다. 근자에 모임을 제한하는 거리두기 명령 앞에서 ‘그동안 교회가 왜 그렇게도 모여 있었나?’ 하는 당연에 제동이 걸렸다.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갈 것인가’도 넘겨짚을 수 없는 시대다. 신구약성서 본문과 종교개혁자들을 두루 인용하며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공동체를 위한 지침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결핍과 병리를 짚어내고, 해결 방안과 바른 지향을 제시한다. 도처에서 보이는 나 자신의 모습에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때마다 그리스도의 자비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넘길 수 없음을 절감했다.
함께 또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
교회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는 끝내 허망한 환상이 되고 말았다. 곳곳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상처를 준 적 있냐고 물으면 그런 적 없는데, 상처를 받은 사람은 부지기수다. 어디서 상처를 받은 것인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도움 얻기를 바라며 공동체를 찾아온 사람들이 얼마 가지 않아 실망을 맛보며, 그 후에는 자신의 잘못이 마치 공동체만의 잘못인양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공동체에서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홀로 있을 것 같지만 이내 다른 공동체를 찾는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나를 드러내지 않고서도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한다. 인격적인 관계로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그저 군중 속에 머무를 수 있는 보다 편안한 관계망 속으로 피신하며 거기서 안전감을 누리려 한다.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로 인해 어딘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과,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을 한다. 본회퍼는 이것이 “더욱 치명적인 고독감을 안겨 줄 뿐인 환각 상태”임을 갈파하고 그 결과는 말씀과 모든 참된 체험을 해체시키고, 끝내 체념과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상처가 생기면 아픔을 느끼고 상처에 누가 손을 대려고 하면 펄쩍 뛰며 놀라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아픈 사람 탓만 할 수 없지만, 만약 교회 안에 ‘군중 속에서 위장된 위안만을 얻으려는 구경꾼 신자들’만 있다면 교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교회와 신앙 공동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문제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본회퍼의 말처럼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공동체를 주의해야 하고, ‘성도의 교제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누군가와 같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다. 왜 홀로 있어야하나?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따라 성경묵상, 기도, 중보기도(Fürbitte, 중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함께 있어야 하나? ‘함께 있도록 부름 받았고 지음 받은 우리’는 결코 홀로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 기도, 성서읽기, 찬양에 일으키는 변화
초기 기독교 전통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가정교회에서 드리는 시편 기도, 찬송과 성경 읽기는 우리의 새벽기도와 일맥이다. 겉으로는 매우 비슷한 형식이지만 내용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 기도는 개인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청구서 다발 같은 기도 제목들을 나열하는 말잔치가 아니다. 시편 기도다. 시편 기도는 우리 기도의 정의와 내용을 새롭게 하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로 귀결된다.
“시편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며, 한 개인으로서 내가 드리는 기도는 교회가 드리는 전체 기도의 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76쪽)
“기도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쏟아놓는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결코 중단함 없이 꾸준히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기억 속에 각인시켜 나가는 일입니다.”(77쪽)
말씀도 짤막한 말씀 묵상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힘과 교훈을 얻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짧은 삶의 지침으로 성경 본문을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독(連讀)의 방식으로 예언서, 복음서, 서신, 계시록을 상호 연관성 속에서 꾸준히 읽는 것이다. 찬송도 공동체 안에서 제창의 형식으로 함께 부를 때, 그 자체가 노래로 부르는 말씀이 되며 같은 시간에 같은 언어로 말하며 기도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 본회퍼의 제안이 우리의 매일 새벽기도와 성서읽기, 찬양에 구체적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이른 아침 삼위 일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찬양을 다시 배우기를 원한다면, 다시 말해 어두운 밤에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우리가 새 날을 맞이하도록 깨워 주시는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위해 무덤과 지옥을 이기시고 우리 가운데 승리자로 서 계신 세상의 구주 성자 하나님, 이른 아침에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추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모든 흑암과 죄악을 쫓아내시고 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는 성령 하나님께 이른 아침 드려야할 찬양을 다시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뜻을 같이하여 동거하는 형제들이 밤이 지난 후 그들의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고 함께 말씀을 들으며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다시 모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침은 개인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에 드려져야 할 시간입니다(62-63쪽).
공동체가 나아가야할 길 – 죄 고백과 성찬
교회가 거대한 위선 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죄가 없음을 참으로 믿으며 죄가 드러나는 것보다 공동체 앞에서 죄를 숨기는 것이 더욱 부끄러운 일임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스스로 경건한 체 하는 사람은 죄인이 자신의 죄를 고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 받는 은혜의 복음을 이해할 길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용서할 권세가 주어졌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죄를 고백할 때 더 이상 인간의 모임이 아닌 성도의 교제로, 십자가로, 새 생명으로, 확신으로 가는 도약과 돌파가 일어남을 깨닫게 해준다.
죄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주의해야할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주의해서 보아야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죄 고백을 듣는 형태를 경계해야한다. 죄 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이 죄 고백을 들을 수 없으며 죄 고백이 자칫 공로로 여겨질 위험성도 일깨우고 있다.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 안에서만 용서와 화해가 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사람은 주의 식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생겨난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은 성찬으로 마침내 완성된다.
<성도의 공동생활>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충격을 준다. 청취의 사명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는 ‘한 번 만난 적 없는 본회퍼가 어떻게 나의 대화 속에 들어와 이렇게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나’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자기 말만 하지 않고 잘 듣는 것이 섬김이며, 듣는 것이 우리 사명임을 새겨야한다. 다른 이들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사실도 엄숙한 진리로 우리를 교훈한다.
신현희 목사 (안산나눔교회)
신현희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