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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사람들에게

기사승인 2021.11.29  23:38:40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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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친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C. S. 루이스를 잇는 기독교 변증자다.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그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맥그래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신학을 공부하고 옥스퍼드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과학과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 맥그래스는 영문학자 루이스보다 더 폭넓게 문학, 과학, 철학, 그리고 신학을 넘나들면서 논리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했다.

맥그래스는 21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자라고 말할 만하다. 그는 현대 과학 이론과 종교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의 상관성을 지적하면서 복음주의의 미래가 밝다는 점을 밝혔다. 특히 그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허점을 지적하는 『도킨스의 망상』을 쓰기도 했다. 그가 2011년에 낸 두 권의 책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두란노)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변증』(국제제자훈련원), 그리고 2018년에 쓴 『지성의 제자도』(죠이북스)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꼭 읽어야 할 기독교 변증서들이다.

여기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변증』의 5장에 나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소개한다. 이 글에서 맥그래스는 기독교 신앙을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도킨스를 비롯한 ‘신무신론자’들의 맹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나 하나님에 대한 체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점을 여러 학자의 주장으로 뒷받침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명쾌하게 변증하고 있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도킨스를 비롯한 현대 무신론자들의 논리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적 확신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 * * 

2006년에 ‘신무신론’이 발흥하면서 신앙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는가? 신무신론의 익숙한 표현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비합리적이다”였다. 전투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는신앙이란 증거를 피해 도망치고 모래에 머리를 처박으며 생각하길 거부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초기에는 많은 언론이 이런 비판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이 비판이 얼마나 얄팍한지 드러난다. 다른 모든 시각과 마찬가지로 신무신론 자체도 증명되지 않은 그리고 증명 불가능한 신념과 도그마를 담고 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존 그레이처럼, 계몽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자들은 계몽주의가 지식의 보편적 토대와 기준을 추구했으나 이러한 추구는 엄청나게 축적된 반대 증거의 무게에 짓눌려 흔들거리고 비틀거리더니 마침내 와르르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유일한 보편적 합리성에 대한 비전은 옹호될 수도 성취될 수도 없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분명하고 뚜렷하며 절대적이고 순전히 합리적인 진리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믿는 바를 정당화해주는 기준을 분명히 밝히고 변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믿는 바가 증명을 초월한다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바는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대중화시킨 표현을 빌려, ‘작업가설’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분명해진다. ‘강간은 나쁘다’와 같은 윤리적 진술은 참이라고 증명될 수 없다. 이성으로도 증명이 불가능하고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파시즘보다 낫다’는 정치적 진술도 참이라고 증명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러한 도덕적, 정치적 신념을 믿기를 그리고 그 신념을 토대로 행동하기를 그만 두지는 않는다. 이것은 개인 윤리와 정치적 관점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이것은 정의 같은 사회적 신념에도 적용된다. 정의 개념이 없다면 어느 나라나 사회도 존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순수이성을 토대로 정의에 관한 어느 구체적인 개념이 옳다고 증명하지는 못한다. 

최근 하버드 대학 정치학 교수 마이클 샌델은 모든 정의 개념이 인간 본성과 가치와 목적에 관한 일련의 신념을 비롯해 선한 삶의 개념에 의존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바르게 지적했듯이, 이러한 신념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서구 문화에서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외치던 위대한 시기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몇몇 사상가들은 이성이 실제로 이러한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20세기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제는 거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신념에 의존하지 않고는 정의에 관한 물음에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정의를 순수이성의 토대 위에 세우려는 계몽주의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순수이성’이라는 개념은 허구일 뿐이다. 합리성의 개념은 문화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얼마 전에 옥스퍼드 대학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지적인 역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 경은 이 모두가 똑같은 결론을 향한다고 했다. 벌린은 인간의 확신이 세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 경험적 관찰을 통해 확립될 수 있는 확신. 2. 논리적 추론을 통해 확립될 수 있는 확신. 3. 둘 중 어느 것으로도 증명이 불가능한 확신.

첫째와 둘째 범주는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와 수학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증명’은 다음과 같이 매우 좁은 범주의 진술에만 적용된다. ‘1+1=2,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물의 화학식은 H2O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 진술은 논리적으로 증명이 가능하고, 셋째 진술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셋째 범주(둘 중 어느 범주로도 증명이 불가능한 확신)는 인간의 문화를 형성하고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가치와 이상을 포함한다. 달리 말하면, 셋째 범주는 인간의 삶에 이유와 방향과 목적을 주며 이성이나 과학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신념을 포함한다. 

무엇이 여기에 해당하는가? 1948년 유엔은 ‘기본인권’에 대한 믿음을 재천명했다. 유엔 인권선언은 논리적이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하다. 억압이 악하다거나 강간이 잘못이라는 신념도 증명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이런 신념이 옳고 중요하다고 믿으며, 이러한 신념을 필생의 길잡이로 삼는다.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강력히 비판하며 지적하듯이, “우리는 확실한 합리적 정당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 마땅한 숱한 신념을 붙잡는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이 가운데 하나다.

철학자 앨빈 플란팅가는 여러 해 전에 이것을 지적하면서 ‘타인의 마음’이라는 해묵은 문제를 언급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이 있음을 완전하게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이것은 안전한 추정이며 세상 이치에 맞아 보인다.” 그런 다음 플란팅가는 ‘타인의 마음’의 존재 증명과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도 증명이 불가능하며 양쪽을 모두 반박하는 훌륭한 논증을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둘을 변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둘 다 완전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이 이런저런 것들을 참이라며 합리적인 것으로 믿으나, 엄격히 말하면 이러한 믿음은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종교적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신앙’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듯이, “내가 어느 종교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간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할 때 내 말은 ‘나는 그것이 참이라고 여긴다’는 뜻이다.” 하나님, 정의, 인권에 대한 믿음은 모두 이러한 추정의 과정을 겪는다. 여기서는 이 셋만 언급하지만, 다른 것들도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다.  

무신론 저자들은 흔히 인간 이성의 한계를 고려하지 못한 채 자신의 확신은 철저하고 믿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자신은 옳은 것을 따를 뿐이라고 말한다. 무신론 변증가 크리스퍼 히친스는 자기 같은 무신론자들은 믿음을 품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틀린 말이다. 히친스가 자신을 속인다는 생각이 든다. 

히친스의 종교 비판은 증명이 불가능한 핵심적인 믿음에 기초하는 게 분명하다. 히친스의 강력한 종교 비판, 이를테면, ‘종교는 악하다’거나 ‘하나님은 선하지 않다’는 등의 비판은 특정한 도덕적 가치관, 곧 증명이 불가능하고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귀결되는 가치관에 기초한다. 

히친스의 종교 비판은 일차적으로 도덕적이다. 따라서 히친스는 자신이 증명하지 못하는 특정한 도덕적 가치관을 상정해야 한다. 모든 도덕적 가치관은 궁극적으로 믿음에 기초한다. 결국 히친스의 기독교 비판은 그의 믿음에 기초하며 그의 믿음을 표현한다. 자신이 참이라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도 참이라 믿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실제로 논리나 과학을 통해 참이라고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기초하여 이것들을 표현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란 단지 특정한 것이 참이라고 믿는 게 아니다. 믿음이란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란 단순히 ‘나는 이것이 참이라고 믿는다’라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 사람을 신뢰한다’라는 관계와 실존의 문제다.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지혜롭고 사랑이 넘치며 선하신 분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C. S. 루이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은 우리의 신뢰를 요구하는 인격체다. 

따라서 믿음이란 단지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의 존재 방식에서 다른 존재 방식으로 넘어가는 질적 도약이라고 강조했다. 기독교 신앙이란 우리 세계의 기존 항목에 또 하나의 항목, 곧 하나님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러한 신뢰로 가능한 새로운 존재 양식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천재로 널리 인정받는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의 핵심에 관해 깊은 의심을 품었다. 그는 논증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우리의 삶과 역사와 경험을 다른 무엇보다 의미 있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보다 이성적일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다.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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