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말라기 2장 6절~14절

기사승인 2021.12.06  12:39:27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공유
default_news_ad1
article_right_top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말라기 2장 6절~14절

 

 

1.하나님을 멸시하는 제사장들

 

① (6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인 예배의 타락이었다. 제사의 타락은 제사를 주관하는 역할을 위임받은 제사장들의 타락이었다. 특정한 제사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타락했다. 제사장들의 죄악은 경외해야할 하나님에 대한 멸시다. 멸시는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다. 아비에 대한 공경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내고 주인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이심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이 경외하는 대상을 신뢰하고 의뢰하기 마련이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 아닌 사람이나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경외하는 행위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앞장선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물신숭배’에 빠져있다.

 

② (6절하~7절 상)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 (메시지성경) “너희는 말한다. 그럴 리가요! 저희가 어떻게 주님을 멸시한단 말씀입니까? 너희의 조악하고 천박한 예배로 나를 멸시한다. 너희가 묻는다. 멸시하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체 어떻게 멸시한다는 말씀인가요?”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도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스스로 이 정도면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도리어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가장 타락한 교회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라기 시대에 여호와를 멸시하던 제사장들처럼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른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타락과 침체의 원인에 대해 자성하기보다 외부적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배움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비움에서 시작된다. 깨끗함은 자신의 더러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의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는 사람이다. 주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 다만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회개치 않으면 백약이 무효한 구제불능이다.

 

③ (7절 하)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 (메시지성경) “너희는, ‘하나님의 제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더 이상 최우선적인 과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나를 멸시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나님은 중심을 감찰하신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 속에 우리의 중심이 드러난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물질이 있는 곳에 중심이 있다. 돈을 어디에 지출하는지 보면 중심을 안다. 누구나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위해 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홈니와 비느하스에게 하신 경고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29~31)” 물질과 건강, 자녀가 소중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물질이 소중하면 물질을 주신 분, 건강이 소중하면 건강을 주신 분, 자녀가 소중하면 자녀를 주신 분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2. 타락한 예배의 실상

 

① (8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 구약의 제사는 희생제사다. 짐승의 번제는 죽어야하고 곡식의 소제는 부서져야 한다. 자기부인으로 드리는 희생과 달리 자기과시로 희생하는 시늉만 하는 짓은 악한 것이다. 흠이 없고 온전한 것을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이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신앙생활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11:15~17)” 온전한 양을 전시해 놓고는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과 바꿔치기를 하고 세겔로 바치는 성전 세를 환치기해서 수수료를 착복하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비호와 결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라기는 총독에게 바치는 세금이나 공물에 빗대어 세금이나 공물을 탈루하는 탐관오리에게 내리는 엄벌에 처할 것을 경고한다. 이는 총독이 기뻐할 일이 아니라 매 맞을 일이다. 눈에 보이는 총독은 두려워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멸시했기 때문이다.

 

② (9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 예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예배로 타락하면 은혜가 사라진다. 은혜가 없으면 감사와 기쁨도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모든 삶은 예배에서 시작된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사라지면 내 노력과 수고로 살게 될 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과 축복은 누리지 못한다. (메시지성경) “이런 짓을 해놓고도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리라고 생각하느냐?” 타락한 예배의 결과는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는데 씨 뿌리는 시늉만 했는데 어찌 풍성한 열매를 바랄까.

 

③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는’ 헛된 제사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물을 불사른다고 다 산제사가 아니듯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다 온전한 예배가 아니다. 가인의 헛된 제사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헛된 예배가 있다. 제물이라고 다 제물이 아니라 헛된 제물도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6:1).” 외식으로 행하는 구제와 기도, 금식과 봉사, 예배와 헌신은 사람에게는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상급은 없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몇 차례 예루살렘 성전의 문을 닫으셨다. 주변 열강에 의한 성전파괴사건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전의 문은 누가 닫았나? 우상숭배로 인한 자업자득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신 일이다.

▶ 솔로몬 성전이 있던 남 유다는 요즘으로 말하면 정통교회이고 벧엘과 단에 산당에서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기던 북이스라엘은 이단이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미가는 남 유다도 북이스라엘을 타산지석 삼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다. 한국교회가 그토록 경멸하는, 이단사이비 신천지와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소위 정통교회와 이단 신천지의 근본교리와 신앙양태는 다르지만 양적인 성장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성장주의’, 세속적인 부와 영광을 추구한다는 ‘물질주의’, 인간적인 공로를 앞세우는 자력구원의 성향을 띠고 있다는 ‘공로주의’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오늘날 정통이나 이단이나 할 것 없이 세상풍조를 따라 물들어가는 ‘세속화’라는 우상숭배를 범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장에서 성숙’, ‘열복에서 청복으로’, ‘나의 공로에서 주의 은혜로’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을 닫으신 전대미문의 코로나재난은 우연 아닌 온 세상과 교회를 조율(調律, tuning)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3. 예배에서 축복만이 아니라 저주도 나온다!

 

①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 하나님을 경외하면 말씀대로 준행한다. 왜 말씀대로 준행하게 하시나? 준행하면 동행하시고 마침내 축복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척도가 예배다. 왜, 예배하게 하시나?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이다. 축복의 본보기로 선택받은 유대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지 않으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이방인들을 통해서라도 축복의 본보기로 삼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예배)하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원하시는 까닭이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이라 부른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말1:5)”,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13:57)”,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4:24)” 예수께서는 나사렛과 가버나움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이방인들 중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② (12절~13절)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 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 (메시지성경) “너희만 예외다. 너희는 나를 높이기는커녕 모독한다. 너희는 ‘예배가 뭐 그리 중요한가?’ 라고 말하고, ‘예배는 지루하다. 내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나를 모독한다. 너희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나 만군의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 한다! 또 너희는 내게 싸구려나 폐품, 쓰레기 같은 것들을 바친다. 내가 그런 것들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나 하나님이 말한다!” ‘번폐스럽다’ 개역개정은 ‘번거롭다’로 번역한다. 도무지 참기 어려울 만큼 귀찮고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일컬을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4:4~5)”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리는 예배자도 함께 받으신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물과 예배도 있다는 사실이다. 더러운 예물과 그릇된 예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③ (14절)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메시지성경) “나를 위해 뭔가 큰 일-값진 희생제-을 할 것처럼 잔뜩 폼을 잡다가, 결국은 하잘 것 없는 것만 가져오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위대한 왕이요, 세상 도처에서 높임을 받는 만군의 하나님이다. 결단코 그런 일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고귀한 축복을 받았지만 정작 하나님께 흠 있는 것으로 돌려 드리는 속임수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모든 예배가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예배는 도리어 저주를 자초한다. 말라기 시대에 제사장들은 제사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잘못 드린 것이다. 말라기는 전대미문의 재난으로 선교130년 역사 가운데 최대의 위기를 만난 한국교회의 최우선 과제를 뚜렷하게 증언한다. ‘회개하는 시늉을 멈추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온전한 예배를 회복하라!’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