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신기식 소설 「다말의 짜악 ןעק」

기사승인 2021.12.06  12:42:51

당당뉴스 webmaster@dangdangnews.com

공유
default_news_ad1

소설
「다말의 짜악 ןעק」

 

애국지사 이가순-이원재 장로 평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

 

   
 

저자 신기식
1953년 경기 강화도 출생,
감리교신학대학교, 연세대학교연합신학대학원 졸업
신생교회 담임목사, 고양YMCA창립이사, 이가순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고양자치발전시민연합 상임대표, 고양시의제21상임대표 역임.

법정투쟁으로 3차례 감독회장 선거무효, 총회무효 선고를 이끌어 낸 경험으로 2018년 2월 종교개혁500주년 헌정소설 「황금저울」 발표, 2018년 4월 「교회법 이해」, 2020년 11월 「교회재판 실무」, 2021년 11월 애국지사 이가순-이원재 장로 평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 발표, 12월 교회 내 성폭행 문제를 고민하며 소설 「다말의 짜악ןעק」 발표.

 

소설 ‘다말의 짜악’

 

어여뿐 공주 ‘다말’이 이복오빠 암논에게 강간당하고 옷이 찢긴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부짖는 모습이다. 3,000년 전의 ‘Me too’다. 2년 후에 ‘암논은 살해되고 아버지 다윗왕은 아들의 반란에 쫓겨나고 후궁들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은 다윗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부하 장수의 아내와 간통하고, 임신한 흔적을 지우려고 여인의 남편을 최전선으로 보내어 죽게 했기 때문이다.

족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왕의 28대 자손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손을 이은 며느리 ‘다말’, 이방기생 ‘라합’, 재혼한 이방여인 ‘룻’, 간통녀 ‘밧세바’, 혼전임신 처녀 ‘마리아’같은 등장인물은 좀 그렇다. 하지만 작가는 이순(耳順)이 훨씬 지나서야 이런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성폭행을 당한 다말 공주의 비통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상의 원리를 신화적(神話的)으로 이해했다. 근원적인 공간(틈)을 ‘카오스’, 원료를 ‘가이아’, 그리고 결합의 원리는 ‘에로스’라고 했다. ‘카오스’가 처녀생식하여 ‘밤’과 ‘어둠’이라는 근원적인 환경이 만들어 지고 난 후 에로스의 작용으로 ‘낮’이라는 현상이 생성되었다. 어둠은 창조의 근원이고 역사의 심연(深淵)이다.

‘에로스’는 그리스 신들처럼 변신을 거듭했다. 신의 족보에 편입되면서 죽음의 신(타나토스)이나 불화의 신(에리스)과 대립되는 생명력으로 이해되었다. 여신들의 미인 경쟁을 심사하는 일에 끼어들었던 일 때문에 일어났던 ‘트로이’ 전쟁사 ‘오딧세이’는 승자 패자 가릴 것 없이 영웅들이 지옥까지 방황하는 비극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에로스의 원리로 여성들은 변신한 신들과 영웅의 자식을 낳았다. 이 후 에로스는 지고의 선(善)에 이르는 정신기능으로 이해되다가 14세기 르네상스 이후부터는 점차 거스를 수 없는 육체적 본능으로 이해되었다.

1980년 이후에 군부 독재는 빵과 유흥 거리를 제공하며 통치를 유지했다. 특히 에로티시즘 영상물은 농도가 짙어지다가 2,000년도부터 인터넷으로 급속도로 보급됨으로 성개방 풍조가 확산되자 간통죄가 폐지되고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점차 향락산업의 미래 고객으로 길들여져 갔다. 정부는 먹고사는 일이라 여겨 향락산업 통제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세를 부를 일은 아니다. 간통죄 족쇄가 풀린 대신 성범죄, 성매매, 성보호 특별법이 제정되어 울상을 짓게 되었다.

현재 교회는 음란의 바다에 표류하는 배와 같다. 성범죄는 대형교회 유학파 우두머리 조현세 목사가 선도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여성들을 탐했다. 피해자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돈으로, 구르밍으로 보쌈질 했다. 조직 보호를 구실로 충성 경쟁을 유도하며 패를 가르고 폐쇄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 바다에 뛰어들던지, 조용히 순응하던지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예진, 지나, 지연, 은하, 성연 공주들은 복수의 여신처럼 세상 끝까지 조현세를 괴롭혔다. 결국 5,000억원의 예수의 초상화 ‘살바트로 문디’를 불태우며 절규했다. ‘조현세는 회개하고 물러나라’

 

인물평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

 

이가순 장로는 1867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망명지 연해주에서 1909년 원산에 잠입하여 원산 상리교회에서 전도사역을 하였다. 원산은 1903년 하디 선교사의 회개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함경도, 만주, 연해주를 드나드는 통로였다. 아들 이원재는 세브란스 의전 제4회 졸업생으로 의사고시에 합격하여 1914년 원산 구세병원 의사를 시작으로 만주 하얼빈 고려병원, 강릉 관동병원, 서울 공덕동에 금강병원을 설립했다. 하얼빈에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강릉중앙교회와 공덕교회 장로로 헌신하였다. 말년에 능곡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노백린 장군의 사위로서 해방 전까지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부자(父子)는 말년에 수리간척사업으로 농민들에게 농토를 만들어 주고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농촌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이가순의 원산 3•1만세운동

이가순 장로는 상리교회에서 3•1만세 운동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오화영 목사와 정춘수 목사를 모셨다. 1919년 3월 1일 정춘수 목사가 민족대표로 나서자 원산에서 교회와 학교, 사회단체를 규합하여 3•1만세운동을 지휘했다. ‘원산 호랑이’ 별명을 가진 이가순(52세)은 동지들에게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후손을 위하여 일사(一死)를 각오하고 이 운동에 참여 하여야 한다”고 격려하였다.

그 결과 이가순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재판장에 끌려갔을 때에도 “너희는 이 재판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너희는 무력으로 남의 것을 뺏은 자들이요, 나는 무력이 없으므로 해서 나라를 빼앗긴 사람이다. 남의 것을 흠친 자가 빼앗긴 사람을 재판할 수 없다”라고 호령을 치자 일본인 재판장은 황급히 휴정을 선포하고 재판정을 떠났다.

1922년 이가순은 출옥하자 원산에 대성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었다. 1927년 7월에는 원산신간회 책임자가 되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공산주의, 기독교사회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심했을 때 ‘뿌리와 가지는 여럿일 수 있으나 줄기는 하나’라는 취지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봉건주의 좌표로 창립되었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타격을 주어 한반도 식민정책이 중단되고 농민수탈도 벽에 부딪혔다.

이가순은 원산지역의 실제적인 민족 지도자였다. 1928년 12월, 원산 부두노동자의 82일간의 파업을 지원하며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였다. 1930년 7월 24일에는 수해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해 원산노동조합연합, 청년동맹, 신간회, 근우회, 소년척후대, YMCA 천도교 청년당 등 11개 단체가 참여한 사회단체연합수난구제회’를 결성하여 구제활동을 하였다. 1931년 12월 27일, ‘동광’ 잡지사에서 김병로, 유광열, 문일평, 이광수, 주요한이 참석한 동서고금인물좌담회에서 당시 조선의 인물 중 함경도 지역에 노인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이가순이라고 모두가 동의했을 정도였다.

1924년, 이원재는 아버지의 권유로 하얼빈 고려병원을 정리하고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관동병원을 개원하고 8년 동안 진료활동을 하면서 강릉중앙교회에 장로로서 헌신하며 강릉신간회를 설립하였다. 이런 배경에는 의료 선교사들의 은혜와, 구세병원 진료 중 세균에 감염되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고열로 사경을 헤매다가 교인들의 철야기도로 고열이 내리는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병원 수입으로 틈틈이 구입한 땅은 6년 후에 수리간척사업에 필요한 재원이 되었다.

 

농촌경제부흥

1932년에 의사 이원재는 8년의 강릉생활을 정리하고 65세의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자녀교육 때문이다. 서울(고양군) 공덕동에 초가 6채를 구입하여 금강병원 개원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만주가 점령되는 것을 보며 일본의 패망이 늦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덕감리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였다. 아내 노숙경 여사도 여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열심히 봉사하였다.

이가순, 이원재 장로가 1933년부터 17년 동안 농촌경제 문제에 전력한 배경은 이러했다. 일제는 허약한 왕권을 속절없이 짓밟고 한국 침탈행위를 계속하였다. 1912년에 토지조사령을 공표하고 대규모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겼고, 조선총독부는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토지를 소유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해 줌으로 일본인 대지주가 등장했다. 1927년도에 100정보(30만평) 이상의 한국인 토지주는 335명으로 줄어든 반면에 일본인은 553명으로 증가하였다.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의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50%에서 70% 이상으로 소작료를 착취당했다. 이어서 일제는 1917년 수리조합령 공포하고 산미증식을 위해 수리조합 설립을 추진하였다. 성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자 1926년부터는 저리융자로 수리조합 설치를 독려하였다. 수리조합은 일본인 지주가 주도하면서 농민에게는 생산량의 86%에 달하는 비용이 부과되었다. 그래서 수리조합반대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일제는 1933년에 수리조합 계획을 중단하였다.

민족주의자들과 YMCA운동가들은 농촌계몽에 열중했다. 감리교연회도 농촌부를 설치하였으나 사업보고는 미미하였다. 협성여자신학교도 YWCA와 연결하여 농촌계몽 사업을 전개했다. 이 때 심훈의 상록수의 여주인공 최영신이 등장했다. 그러나 문맹퇴치와 농민의식개혁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가순 장로는 농촌경제 문제해결을 실천했다. 40년간 독립운동을 하면서 조직이나 이념운동의 한계를 깨달았다. 이원재 장로는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해주와 강릉의 가산을 정리하여 수리관개사업에 투입했다. 10만평 토지를 매입하여 ‘백석농장’을 조성하였다. 이원재 나이 47세였다. 당시 한강 주변은 밭두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갈대투성 황무지였다. 수리시설이 없어서 쌀농사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샛강 물을 물레방아와 용두레로 퍼 올리거나 물지게로 옮겨서 힘겹게 수수농사를 지었다. 이가순은 행주산을 오르며 양수장의 위치와 농업용수로의 방향을 구상하고 행주산성 아래에 양수장을 마련했다. 농수로는 농한기에 농민들에게 노임을 주고 만들어 나갔다. 17년간 거액 48만원(현재 480억원)의 사비를 들여 농지를 개간하여 나누어 주고 농민 중심의 수리조합을 만들었다. 15㎞의 수로가 삼성당, 백석농장, 섬말다리를 지나 장항리까지 이어졌다. 2차로 10㎞가 더 이어져 파주경계까지 이르렀다. 현재는 파주 교하 신남동까지 35.7㎞를 이어져 양수장에서 퍼 올린 한강 물은 수로를 타고 15시간을 흘러간다. 황무지는 옥토로 변했고 쌀 생산이 시작되자 농민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농민들은 단군 할아버지가 땅에 환생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이원재 의사는 도로가 불편한 능곡, 신평리, 백석, 장항 농촌의 넓은 지역을 백말을 타고 순회진료를 하였다. 25년차 경륜있는 의사였지만 미국 의료선교사들에 비하면 여전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낮 병원과 수리간척 일을 병행했다. 농민들의 생활자립을 돕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수리간척 사업을 한지 10년 되는 해, 이가순은 1943년 4월 12일 75세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고귀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원재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1945년 3월 5일 일제하에서 당당하게 수리조합 인가를 받았다. 경지면적이 증가하여 3,744ha까지 늘어났다. 당시 고양군 총경지면적의 50%에 해당되는 규모이며 조합원 수도 4,000여 농가였다. 농촌이 풍요롭게 변했다. 농업협동조합이 면 단위마다 설립되었다. 고양군의 농업협동조합 예금고가 전국제일이 되었다. 1980년대 정주영 현대 회장이 이룬 서산간척사업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반면에 같은 시기에 원산상리교회 출신 정춘수 목사는 감리교회 감독이 되어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친일에 앞장섰다.

이원재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던 두 아들 중 장남 동훈이 23세 졸업반 때(1940년도) 갑자기 죽는 불행을 겪었다. 이원재 부부는 너무 비통하여 300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초가집 교회(능곡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교회주변 이원재의 과수원 부지 2,030평도 교회소유가 되었다. 1947년에 능곡초등학교 건물이 소실되자 백석농장을 처분한 돈으로 학교를 복구해 주었다.

이원재는 1950년 2월 6일, 64세의 아까운 나이에 별세하였다. 의사로 직접 항일투쟁에 나설 수 없었지만 두 여동생과 여섯 자녀와 노백린 장군의 세 자녀를 돌보고 살아온 가장의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 장례식은 고양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애도하는 장례행렬 만장이 2㎞에 이어졌다. 수리조합 재산은 모두 국가(현, 한국농어촌공사)에 헌납되었다. 자녀들에게는 땅 한 평도 상속하지 않았다. 공부만 시켰다.

1950년 4월, 이원재가 세상을 떠난 해, 행주양수장에 장엄한 한문체로 된 ‘이가순관개송덕비’가 세워졌다. 송덕비건립위원은 조익순(趙益洵), 윤원삼(尹原三), 맹관호(孟觀浩), 최춘근(崔春根)이었다. 조익순은 평양의전 출신 제1기 제1호 의사로 활동하다가 이가순의 농촌부흥운동에 뜻을 알고 동참한 친구다. 그의 아들 조창호 소위는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북한에 있다가 43년만에 탈북하여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 신고를 한 군인이다.

이가순 부자(父子)의 한평생 애국애민의 삶은 참 특별하다. 우선, 미국 선교사들의 사랑에 보답하듯 교회생활에 충실하였다. 한평생 겸손하고 성실한 애국애족의 삶을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헌신하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둘째, 이가순 부자(父子)는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가장으로 칭송을 받을 만하다. 자녀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이가순의 딸 인숙은 여의사가 되어 1952년에 강원도 경찰국장이 된 이범구씨와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다. 원숙은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고 동경 유학생 정준채와 결혼하여 7남매를 두었다. 자녀 중 명훈, 명화, 경화는 각각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을 전공해서 ‘정트리오’라는 세계적인 음악가 집안이 되었다. 이가순의 외손이다. 이원재의 둘째 승훈은 의사가 되었다. 장녀 인철은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여 동래 일신여고서 음악교사를 했다. 2녀 인영과 3녀 인옥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4녀 인순은 약학대학을 졸업했다. 인영은 한국 최초의 지질학 박사인 김옥준(연세대학교 교수)과 결혼해서 4남매 두었는데 7명의 손자들이 서울, 일본, 미국 소재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국방성 직원, 회계사, 의사 3명, 미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굳굳하게 살아가는 것은 의로운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다.

셋째, 이가순, 노백린 사돈의 온가족이 독립운동을 하였다. 넷째, 일회성 독립운동이 아니라 평생 계속하며 한평생 애족애민의 정신적 지도자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들을 독립운동가로 국한하는 것은 부분적인 평가이다. 일제는 농지를 강탈해 갔지만 농민들에게 농토를 만들어 준 것은 물질적인 가치로 판단할 수 없을 만치 참으로 경이롭고 영웅적인 위업이다.

 

출판비 후원계좌 농협 217064-52-030913 신기식

소설 「다말의 짜악」은 시중에서 판매 될 것입니다.

평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는 감리교회 내에 무상으로 배포될 것입니다.

출판비를 후원하신 분들께는 책 택배로 보답하겠습니다.

 

2021년 12월 6일

신기식 목사 올림

당당뉴스 webmaster@dangdangnews.com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