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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식 변화

기사승인 2022.01.19  21:41:24

황은경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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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요즘 같아서는 이 말도 바꿔야 할 것 같다. 10년이라는 세월 속에 강산도 변할 수 있는 긴 시간임을 표현한 말인데, 이제는 긴 시간 기다릴 것 없이 수시로 변하는 강산을 마주 대하게 된다. 변화는 도시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변화라는 바람은 농촌에도 여기저기 사람의 발길이 닿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안 가는 곳이 없다.

1999년도에 서대문 냉천동에 입성했다. 자그마한 공간에 건물 대여섯 개가 전부였던 학교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기저기 뜯어고치더니 자그마한 곳에 덩치 큰 건물들이 위용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위태롭게 들어선 것인지 모르게 변했다. 변하기 전 그 작은 건물들이 예뻐서 가슴과 머릿속에 새겨놓았는데 공부하는 7년 내내 하나씩 하나씩 사라졌다. 학교 안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종종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나만의 명당(?)에서 학교 뒤편에 있는 언덕을 멍 때리며 바라볼 때가 있었다. 옛 단독주택들이 언덕을 따라 자리하고 있었고, 언덕 꼭대기에는 오래된 아파트 한 채가 있었다. 그 언덕엔 봄이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고, 여름엔 녹음이, 가을엔 단풍이 계절마다 바뀌면서 나의 눈을 호강시켜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언덕이 파헤쳐지면서 뚝딱뚝딱 하더니 높은 아파트 건물이 수 채 세워졌다. 그 바람에 나의 눈은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할지, 고향을 잃은 것 마냥 빛을 잃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냉천동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2013년 2월, 음성으로 내려왔다. 내가 딱 좋아하는 곳이었다. 집 뒤는 너른 밭과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집 앞은 시야가 훤히 트이는 경사진 마을이었다. 개똥 부자가 살았다던 옛 흙집은 춥고 더운 공간을 떠나 나의 정서와 딱 어울렸다.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을 제외하면 거의 논과 밭과 산이었다. 집 앞 엎어지면 정말 코 닿을 만한 곳의 사무실에서 종일 있어도 어떤 날은 사람 한 사람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간혹 낯선 사람이 지나가는 날이면 집집마다 있는 진돌이와 진순이들이 일제히 합창을 하여 잠시 고요가 깨질 때가 있지만 낯선 사람이 시야에서 멀어지면 바로 졸음에 빠져들었다. 음성에 수 년을 살았어도 내가 사는 마을을 모르는 사람도 있고, 어쩌다 방문할 일이 생기면 음성에 이런 곳이 있었느냐는 놀라움과 신기함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 입구의 굴다리를 지나서도 한참을 들어서야 하는 곳이기에 옛말로 표현하면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마을이 점차 변하고 있다. 논이 메꿔지면서 밭이 되고, 그 밭은 인삼밭으로 바뀌었다. 농작물을 심었던 밭은 과수가 심겨졌다. 저수지 앞의 커다란 밭은 3년 전 개발업자에게 팔리면서 금새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샌드위치 판넬로 창고 비슷하게 여섯 채가 지어지고 이렇게저렇게 손을 보더니 집들로 탈바꿈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곳에 새로운 주거형태의 마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소속된 교회 근방의 논들도 밭으로 바뀌고, 그 밭들은 또 포크레인이 몇 날 공사를 하더니 순식간에 넓은 터가 되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철골과 컨테이너 건물이 세워지면서 식당과 원룸과 가게로 변했다. 그 바람에 땅값도 10년 전에 비해 대여섯 배는 뛰어버려 우리처럼 가난한 농촌교회는 땅 한 조각 사기 더 어렵게 되었다. 마을 뿐이랴. 지난번 쌀 도정을 위해 정미소를 가려고 코로나로 인해 근 1년 반 가지 않았던 마을을 지나가는데 그 일년 사이에 없던 집들이 길가를 따라, 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내가 알던 마을이었는가 궁금할 정도였다. 또 차를 타고 가다보면 분명 몇 달 전까지는 언덕이요 산이었는데, 그것이 어느새 넓은 축구장 만한 공터가 되어있었고, 그곳에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서 창고형 공장이 세워지고 있었다. 하나의 논이 없어지는 것도 아쉬운데, 수십 년을 지키고 왔던 마을의, 지역의 산이 없어지는 것은 더욱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런 문구가 있었다. 뒷산은 한창 포크레인 작업으로 깍여나가고 있는데 앞산에는 ‘우리의 미래, 우리의 자연입니다.’라는 현수막이 크게 달려 있었다.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고, 정말 웃픈 일이었다.

지금까지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를 반반씩 보내왔지만 그래도 정서는 여전히 아날로그 세대에 가깝다. 지금도 무엇인가 바꾸려면 한참을 고심하고 망설인다. 더디어서 불편한 면도 있지만 그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은 내 몸 안에 아직 아날로그의 방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것들이 나의 아날로그 추억을 갉아 먹는 것 같아 마구잡이식 변화에 잠시 볼멘소리를 해본다.

 

황은경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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