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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으로의 초대

기사승인 2022.07.03  22: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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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으로의 초대
고후 8:1-7
(2022/07/03, 성령강림 후 제4주)

음성으로 듣기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도에게 청하기를, 그가 이미 시작한 대로 이 은혜로운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완수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곧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장마 기간 중에 잠깐이지만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작은 틈을 통하여 잠깐 비치는 햇볕을 일러 볕뉘라 합니다. 볕뉘는 구름 너머에 맑은 하늘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삶도 그러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 속에서 바장이는 이들이라 해도 새로운 시간이 다가옴을 믿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찬 비가 내리던 며칠 전 새벽, 공원을 홀로 걸었습니다. 개구리와 두꺼비가 발에 채일만큼 산책로에 나와 앉아 비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우산을 받고 걷다가 문득 새들은 어디서 이 세찬 비를 피하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은 누추할망정 해와 비를 피할 공간조차 없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이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저절로 기도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우리는 완도에서 초등학생을 포함한 일가족 3명이 탄 자동차가 인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가족은 절망의 나락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어른들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천진난만한 아이의 때 이른 죽음은 가슴을 미어지게 합니다. 그들은 설 땅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천애의 고아가 되어버린 것 같은 쓸쓸한 시간, 모든 사회적 관계의 끈이 다 끊어졌다고 느낄 때 사람은 심연에 이끌리게 마련입니다.

지금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를 올리는 이들 가운데도 심연에 이끌리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북돋워주는 이들이 있는 한 희망은 스러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분을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린다 해도,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시편 시인은 회중들을 하나님 찬양으로 초대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을 고치시고, 그 아픈 곳을 싸매어 주신다.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신다”(시 147:3-4).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사 49:15). 사방이 막힌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 위기 속에 있는 교회
교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은유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입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갔을 때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은 교회는 ‘구원의 방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표현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터하여 살고 있는 세상은 죄의 시궁창이라는 것일 겁니다. ‘구원의 방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에는 저항감이 스멀스멀 솟아나곤 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사는 모습이 교회 밖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삶으로는 주님을 부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다소 배타적으로 들리는 ‘구원의 방주’라는 말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은유에 더 마음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깊은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벗이 되어주고, 자기 삶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인지를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교회의 소명입니다. 교회는 이청준 선생의 소설 제목을 빗대 말하자면 ‘당신들의 천국’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이웃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든 나 몰라라 하면서 주님을 경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변화가 없는 예배의 허망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사 1:12). 말라기의 예언은 더욱 통렬합니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말 1:10).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하는 교회가 병들었습니다. 교파 분열의 문제는 어제 오늘 비롯된 문제가 아닙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우면서 정작 세상에 만연한 아픔은 외면합니다. 세상을 외면한 결과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작은 차이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함이 믿음으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서양 역사에서 기독교는 콘스탄틴 황제 이후 권력 기관이 되었고, 교회의 재산도 늘어났습니다. 무슬림들의 손에 들어간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종교 재판을 통해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나 이단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공신력을 잃어버린 오늘의 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섬기고,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 위기가 기회로
교회가 탄생할 무렵의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무너질 것 같았던 교회는 오히려 예루살렘이라는 경계를 넘어 곳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마치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 떨어지는 자리에서 싹을 틔우듯 그렇게 복음은 세계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일에 크게 기여한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소아시아와 유럽 지경을 넘나들면서 그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그 분이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세우는 데 진력을 다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 로마 문명권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인 ‘에클레시아’라는 말로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흔히 에클레시아는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고 소개되곤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교회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에클레시아는 도시 국가인 폴리스의 중대한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리스 시민들은 폴리스의 의사 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 혹은 정치적 동물이라 말한 것은 그런 뜻에서입니다.

바울 사도도 에클레시아를 유사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고 시작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한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름 받았다는 것은 책임을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 곳곳에 흩어진 교회들을 에클레시아라고 말함으로 그 지역 교회들을 공동 운명 속으로 초대했던 것입니다. 살아가는 장소와 문화가 달라도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보편주의의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종, 민족, 피부색, 언어, 문화가 서로 다른 낯선 이들이 어울리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같은 지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도처에 흩어져 있던 교회를 하나의 에클레시아로 묶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겪고 있던 어려움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예루살렘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자 바울 사도는 아가야 지방과 마게도니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예루살렘의 형제자매를 위해 의연금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다.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모금이 이루어졌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들도 궁핍한 중에 의연금을 모아 보내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교회의 공교회성은 신학 이론을 통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돕는 일을 위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마케도니아 교회의 헌신을 칭찬했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고후 8:2)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특권으로 여기며 동참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도 그런 일에 기꺼이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곧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고후 8:7)

• 폐허 속에서 움트는 희망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인간을 가리켜 ‘이기적 유전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이기적으로 처신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든 인간의 의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화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손에 박힌 가시 하나가 남의 죽을병보다 아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자기중심성에서 가끔 벗어나기도 합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보았을 때 그러합니다. 맹자는 인간에게는 측은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말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지방의 작고 조용한 도시 갠더(Gander)는 2001년 9월 11일 참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펜타곤을 공격한 그 날, 미국 정부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항공기 운항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들은 이웃 나라의 비행장에 착륙해야 했습니다. 38대의 비행기, 95개 국적에 속한 7천여 명의 승객들이 갠더 국제공항에 내렸습니다. 승객들은 지쳤고 어찌할 바를 몰랐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수하물 검사를 마칠 때까지 28시간이나 비행기에 갇혀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걱정할 가족들에게 무사하다고 전할 방법조차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자기들이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승객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고, 그들에게 쉴 공간을 마련해주었고, 더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가게 주인들은 닭고기와 피자와 샌드위치를 제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이 선물로 주어졌고, 통신회사들도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어 승객들이 가족들과 통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Jonathan Sacks, Morality, Basic Books,p.295-6 참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1만 여명의 갠더 시민들은 승객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해주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사람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이끌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역사 속에서 입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이끌어낼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교회는 비로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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