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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하다

기사승인 2022.08.07  18: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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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하다
롬 11:11-16
(2022/08/07, 성령강림 후 제9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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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설 때에는, 그 복이 얼마나 더 엄청나겠습니까? 이제 나는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니만큼, 나는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쪼록, 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가운데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심이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심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삶을 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남은 온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

• 흔들리지 않는 믿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이 입추입니다. 무더위에 다소 지친 몸과 마음에 시원한 하늘 바람이 불어오면 좋겠습니다. “늦더위 있다한들 절서節序야 속일쏘냐. 비 밑도 가비업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 농가월령가의 한 대목입니다. 기후 재앙이라는 전대미문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터인지라 계절의 변화가 반갑기만 합니다. ‘일월영측日月盈昃’. 천자문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해와 달도 차면 기운다는 뜻입니다. 변화가 세상의 이치입니다. 영고성쇠榮枯盛衰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꽃처럼 피어날 때도 있지만 말라버릴 때도 있고, 흥성할 때도 있지만 쇠퇴할 때도 있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면서 바다는 푸르게 유지됩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도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 3:11)고 말합니다. 그 때를 알고 사는 것이 철든 인생일 겁니다. 인생살이는 우리의 예측과 기대를 저버릴 때가 많습니다.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애감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참 사람의 길을 찾아 나선 순례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불화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통찰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하는 자기의 무능력이 그를 아프게 했습니다. 그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만, 자기 몸속에 있는 또 다른 법이 자기를 포로로 삼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법은 ‘죄의 법’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 자기 불화를 처절하게 자각한 이의 외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비참함 속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사로잡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다고 감격적으로 고백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이지만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롬 8:6). 명예와 이득과 권력에 집중되었던 삶이 생명과 평화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삶의 초점으로 삼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 8:30). 이런 확신 때문일 겁니다. 로마서 8장에는 유독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든든함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 8:31b)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롬 8:35)

이런 강력한 고백 끝에 바울은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9)라고 말합니다. 이 도저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 바울의 슬픔
8장에서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휘몰이장단에 맞춰 춤을 추듯,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장엄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쏟아내던 바울의 어조가 9장으로 넘어오면서 사뭇 달라집니다. 그의 기쁨 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슬픔을 그는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롬 9:2-3)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동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건만 동족들은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지만 선민답게 살지도 못하는 그들, 율법 백성임을 자처하면서도 율법의 완성이신 분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그들이 딱하기만 했습니다. 미우네 고우네 해도 자기 동족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광활한 진리의 세계를 경험한 바울은 대롱을 통해 세상을 보는 듯한 동족들을 보며 애가 탔습니다. 동족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다는 그의 말 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정일 겁니다.

고심 속에서 바울에게 떠오른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롬 11:11a) ‘걸려 넘어지다’, ‘쓰러지다’, ‘망하다’라는 비슷한 단어가 연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표현에서 바울의 마음에 일고 있는 격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주 강력한 부정입니다. 사실 11장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마음을 열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입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롬 11:1b). 하나님이 그런 그를 사도로 삼으신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이 은총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남은 자 사상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한 후 자기 시대의 풍조에 절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남은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내가, 바울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내 앞에 남겨 두었다”(롬 11:4). 바울은 이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철회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마음이 완고하고, 눈이 어둡고, 귀가 둔하고, 율법을 등에 진 채 허리가 굽어버린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아주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 오묘한 섭리
동족들의 구원에 대해 깊이 숙고하던 바울은 마침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이방인들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질투도 때로는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설 때에는, 그 복이 얼마나 더 엄청나겠습니까?”(롬 11:12)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이사야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9). 노자는 도덕경 45장에서 ‘크게 곧음은 굽은 것 같고 크게 교묘함은 서툰 것 같고 크게 말 잘함은 말더듬이 같다(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합니다. 더딘 것 같지만 빠르고, 두루뭉술한 것처럼 보여도 예리하고, 복잡한 것 같지만 간명합니다. 그 속도와 방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만 조바심칠 뿐입니다.

서예가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 쓴 한 글자는 그 다음 글자로 결함을 보상하고, 한 행의 잘못은 다음 행의 배려로, 한 연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 감싼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가히 서예를 넘어 서도라 할 만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결함까지도 이용하셔서 당신이 세우신 구원 계획을 이루십니다. 인생을 가리켜 계기적 실존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우리 삶의 방향을 돌려놓았다는 말일 겁니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그것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질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학문의 일가를 이룬 우리 교우 한 분은 초등학교 시절 영어를 가르치던 외국인 선교사가 어눌한 한국말로 했던 말이 오래도록 자기의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씨앗처럼 심겨져서 큰 나무로 자라기도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명예와 이득과 결혼에 허덕이고 있을 때 주님은 웃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런 욕구들로 인해 그는 쓰디쓴 곤경을 맛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황제에게 바칠 축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수사학자였던 그에게 축사를 쓰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축사라면 으레 거짓말이 태반이요, 그 거짓말쟁이에게 식자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일에만 정신이 팔려서 열띤 생각에 허덕거리며 밀라노의 한 거리를 지나다 보니 불쌍한 거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그는 싱글벙글 히히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문득 같이 있던 벗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미친 탓으로 당하는 고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여태 그랬듯이 고달픈 노력을 우리가 다 해왔어도 탐욕의 채찍 아래서 불행의 짐을 지고 가면 지고 갈수록 더 무거워질 따름, 결국 남부럽지 않은 낙을 맛보자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라면 저 거지는 이미 우리보다 앞서고, 그나마 우리는 거기까지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성아구스띤, <고백록> 제6권 제6장, 최민순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2, p.146) 어거스틴은 학식이 있다 하여 저 거지보다 낫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면서, 높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자기를 오히려 비참하게 생각합니다. 이 경험이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단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오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뿌리와 가지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하는 바울은 동족들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가운데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을 버리심으로써 유대인이 아닌 이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으니, 그들을 받아들일 때는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겠느냐고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남은 온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롬 11:16)

이 말씀은 “너희가 처음 거두어들인 곡식에서 떼어낸 헌납물을 너희 대대로 나 주에게 바쳐라” 하신 민수기 15:21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땅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바칠 때 나머지도 다 거룩해집니다. 빵 반죽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 바울은 야훼 신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슴에 품을 때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거부→이방인들의 수용→유대인들의 질투와 회복→은혜로 충만한 세계, 이것이 바울이 이해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도 가끔은 어긋난 길로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오류를 통해서도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루터는 ‘과감하게 죄를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자꾸 눈치나 보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신뢰하며 역동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에 놓고 사십시오.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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