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박흥규(1938-2013)

기사승인 2023.03.18  23:16:33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공유
default_news_ad1

  어느새 10주기를 맞았다. 2013년 고난주간의 어느 날 유난히 잰걸음으로 휘적휘적 길을 떠나신 박 목사님 이야기다. 그는 대관령 옛길 초입의 만나가든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 삼거리 주막 쯤에서 개울 건너 비탈로 오르는 농막 입구의 키 큰 소나무 아래 몸을 풀었다. 나중에 ‘박흥규, 나무되다’라는 작은 묘비가 놓일 바로 그 자리였다. 평소 신발이 반들거리게 닳도록 지나던 텃밭으로 통하는 길가다. 개울 물은 차갑지만, 이미 봄이 와 닿은 즈음이었다.

  10년이면 긴 시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닌 까닭은 기성세대에서도 아직 젊은 축에 드는 내 또래들조차 웬만한 이야기를 꾸밀 때 대체로 몇십 년씩 시절을 거스르며 말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10년, 20년을 내다 보는 일 역시 가볍지 않으니 결코 짧은 세월도 아닌 셈이다. 그렇게 10년은 대관령 개울물처럼 가파르게 흘러가는 중이다.  
 
  박 목사님과 첫 만남이 1984년 여름 일이니, 거의 40년에 다다른다. 첫 목회의 길에 안내를 자처하신 그는 당시 내게 사천왕상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낯선 동네 김포에 내려가 살게 된 동기도, 졸지에 신학교 졸업 전에 교회를 개척한 일도 모두 박 목사님의 무리한 트집에서 시작한 일이다. 목회입문에서 내 출입을 지켜보던 그의 눈총이 늘 따가웠다. 워낙 삶의 뼈대가 굵고 자기 원칙이 강하다 보니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선배였다. 자주 욕을 먹고, 다짐을 들었다.

  그렇다고 기죽고, 말 못 할 내 경우도 아니어서 스물세 살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주 대들었다. 부모 자식 간 나이일망정 넘지 못할 세대 차이는 아니었다. 그만큼 박 목사님은 생각과 몸이 젊었고, 누구보다 당시 기성세대 중 젊은 축에 속하였다. 비록 예순 살에 공상(公傷) 은퇴하셨으나, 그의 인생에서 퇴직은 없었다. 대관령에서 세월을 잊고 살면서도 허구헌날 전화를 걸어 대관령 아래 세상을 궁금해 하였다. “네 사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대관령 곰처럼 미련하게 사는 길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대관령 농막은 부름받은 사람만이 근접할 수 있는 신비한 땅이었다. 그는 날마다 그곳에서 신발을 벗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할 그 길로 떠나신 후에, 몇몇이 농막을 방문해 안팎을 정리하다가 검정 라디오 하나를 찾아냈다. 다이얼을 맞추면 미지의 세계와 통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늘 그리워했는데, 자주 들려드리지 못해 민망할 뿐이다. 
 
  그가 평소 입술을 다시면서 숨을 내뱉듯 강조한 말들은 4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한결같아 그래서 믿음을 주었다. 누구도 그의 인생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몸으로 하는 노동을 신성히 여기고,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또 그리 사는 사람들을 최고로 여겼다. 물론 나는 예외였다. 그 시절 세련되고 센스있는 선배들이 많았지만 애초부터 박흥규 선배에게 덜미 잡힌 나는 행운아에 속한다. 

  병치레로 김포의 여러 병원을 들락거리던 중 색동교회 추수감사주일에 초대하였다. 이렇게 소개하였다. “박흥규 목사님은 내 수호천사입니다. 으레 천사라면 아름답고 착하게 생겼을 거라는 편견을 버리십시오.” 그는 비록 날개는 없었지만 평생 내 편을 들어준 수호천사였다. 건건이 대들던 나를 이해해 주셨다. 자주 서운해 하셨지만, 또 종종 고마워하셨다. 문수산성을 떠나 독일로 갈 때 하신 덕담은 내가 들은 역대급 인생 칭찬이었다. “너는 참을 줄 아는 놈이다.” 

  박 목사님이 아주 떠나기 한참 전 어느 날이다. 신촌에서 만나 서점에 들러 좋아하는 책을 구하고, 삼겹살도 구워 먹고, 회포를 풀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를 강화행 신촌버스터미널 종점에서 배웅하였다. 젊어서 신발이 닳도록 다녔던 그 골목을 익숙하게 함께 걸었다. 작별 인사를 했는데, 종점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시동만 건 채 한참을 떠나지 않고 손님을 기다렸다. 막 차인 까닭이었다. 차창에 앉은 박 목사님과 머쓱하게 손짓을 교환하며 기다렸다. ‘이젠 들어가라, 안녕히 가시라’를 여러 차례 반복한 한참 후에야 버스는 떠났다.

  나중에 박 목사님이 말하였다. “네가 내 장례를 맡아다오.” 그날 버스 종점에서 배웅하던 모습을 보니 자신의 마지막을 잘 배웅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뿔싸! 그런 뻔한 칭찬에 또 속았다. 그런저런 생각으로 박흥규 형님의 10주기 추도식을 여차저차 알리는 중이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