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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역사(잉카제국에서 한반도까지)

기사승인 2023.05.24  05:48:07

임석한 skygrac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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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9월 29일 미국의 〈라이프〉지는 1001년부터 현재까지 1천년 동안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과 인물 각 100가지(명)를 선정하였다. 100대 사건 중 1위는 ‘구텐베르크의 성경인쇄“였다. 그런데 의외로 39위에 해당되는 사건이 ’감자재배‘였다. 인류역사의 수많은 사건들 중에 감자 재배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감자의 시작은 농경이 시작되기 전인 1만 3천년 전부터 남미지역에서 야생종의 모습으로 자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자가 처음으로 남미 원주민들에 의해 경작된 것은 7천 년 전쯤이다. 고대 잉카제국의 언어에는 감자를 표현하는 말과 감자 종류의 이름이 1천여가지나 될 정도였다. 또한 감자농사가 풍년이 들도록 감자신에게 의식을 치르고 제물을 바치기도 했고 치유능력이 있는 것을 알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데 감자를 이용하기도 했다. 안데스의 고산지대에서부터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1532년 금을 찾아 신세계로 진출한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페루에서 감자와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잉카의 원주민들이 먹던 감자에 큰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감자가 잉카인들에게 중요한 식량이라는 것을 깨달은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인들에게 세금으로 걷은 감자를 금광에서 부리는 노예들에게 식량으로 배급했다. 

감자가 스페인으로 전해진 것은 1570년경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먹을 식량으로 감자를 가져가면서 전해졌다. 감자가 스페인에 첫발을 디딘 이후로 유럽 전역으로 전해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럽인들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남미의 원주민들이 주식으로 먹던 감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자는 가난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식용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한 곳은 아일랜드였다. 아일랜드 지역이 감자를 재배하는데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인들의 지배에서 빈곤과 가난을 거듭하던 아일랜드인들에게 쉽게 잘 자라고 다른 곡물에 비해 생산량도 월등히 많은 감자는 신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특히 주식이었던 빵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씻어서 삶거나 굽기만 해도 먹을 수 있는 간편한 조리법 때문에 가난한 농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결과 18세기에 감자는 이미 아일랜드인의 주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일랜드에서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고 감자반찬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감자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음식이 되었다.

독일에 감자가 전해진 것은 스페인의 남미개척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출신 선원들에 의해 이탈리아로 감자가 전해진 이후였다. 감자의 가치를 알아본 독일의 왕은 ‘감자대왕’이라고 불리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Frederick) 대왕이다. 그는 감자가 빈곤에 시달리는 나라를 구할 수 있고 높아만 가는 빵 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는 자원임을 발견했다. 프레데릭 대왕은 1744년 기근을 막을 수 있는 대책으로 지방 군주들에게 감자를 기를 것을 명령했다. 기근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대책으로 감자를 내놓은 것이다. 이로 인해 독일에 감자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에는 한 평생을 감자의 대중화에 바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루이 15세의 신하이자 학자였던 앙투안 오구스탱 파르망티에(Antoine Augustine Parmentier)이다. 그는 감자를 터부시하던 귀족, 왕족들에게 감자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1756년에 벌어진 프러시아의 7년전쟁(1756~1763년)에서 5번이나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이때마다 배급으로 감자만 주어졌다고 한다. 매번 감자만 먹으니 물리기도 할 텐데, 이러한 형편없는 음식에 화를 내는 것도 잠시, 파르망티에는 살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살이 찌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완벽한 식재료가 있다니”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를 외친 그는 그때부터 감자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그는 감자의 위대함을 알렸지만 성경에 감자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감자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파르망티에는 묘수를 떠올린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에서 감자꽃을 선물하고 또 그걸 그녀의 머리에 장식으로 꽂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감자꽃 장식이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고 이를 이용해 왕이 주관하는 ‘감자 요리 연회’를 여는 데까지 성공하게 된다. 이 연회에서는 감자수프, 감자전채, 감자 메인요리, 감자빵, 감자샐러드, 감자쿠키 등 전체 코스를 20여 가지 감자 요리로 장식했다. 프랑스에 대사로 온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도 1767년에 파르망티에에 의해 열린 연회에 참석해 감자요리를 맛보기도 했다. 또 파르망티에는 파리에서 대량의 감자수프를 만들어 굶주린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를 안 루이 16세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빵과 같은 감자를 알게 해준 당신에게 언젠가는 프랑스가 고마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이름을 딴 프랑스 감자 요리인 ‘포타지 파르망티에’와 ‘폼므 파르망티에라’에서 알 수 있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감자는 이후 다시 신대륙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1613년 영국제국이 식민지였던 버뮤다로 감자를 보냈고 이후 버뮤다에서 미대륙 본토인 버지니아로 전해지면서 감자는 신세계에 정착했다. 특히 1845년부터 1850년까지 일어난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 있었다. 감자에 병이 들어 수확을 못 하게 되자, 감자를 유일한 식량으로 삼았던 사람들도 같이 죽어 나간 것이다. 당시 150만 명이 죽었을 정도였다. 이 기근을 피하려고 아일랜드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북미대륙으로 이주했고, 그들의 새로운 터전에 감자를 심기 시작했다. 그들로 인해 감자는 미국의 명물이 되었다. 미국에서 감자를 아이리시 감자(irish potato)라고도 부르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에 기인한다.

감자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선교사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 말에 감자가 전해졌다고 하지만 감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명나라 이후 재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와 교역이 활발하던 나가사키항을 통해 전해졌고, 감자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에 오키나와 지역이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홋카이도까지 재배가 확산되었다.

감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800년대 초의 일이다. 조선시대 후기 만주에서 처음 전해졌다는 설과 산삼을 캐러 왔던 청나라 사람들이 식량으로 쓰려고 몰래 산간지역에 경작하면서 들어왔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감자가 한반도의 농민에게 널리 보급되어 일상의 식재료로 자리를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감자는 우리 식탁에 빠르게 보급되었다. 흉년이 든 어려운 시기에 감자는 가난의 고통을 함께 나눴던 중요한 작물로 자리를 잡았고 논농사를 짓기 힘든 강원도에서는 감자가 주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임석한 skygrac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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