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 사랑은 절대적이다. 퀴어의 사랑도 그렇다.”

기사승인 2023.11.29  04:03:48

최형미 choihyungmee@hanmail.net

공유
default_news_ad1
   
 

사랑은 정의할수 없다.

이우연은 ‘사랑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영상을 보여주며 발표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활짝 웃거나 다정한 포즈를 취하지만 아무도 사랑에 대해 정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덕 철학자 프랭크 퍼트 말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사랑이 이유를 창조한다.’ 그는 사랑이 도덕보다 강렬하게 인간을 지배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랑은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근원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우연은 단도직입적으로 왜 어떤 사랑은 저주, 차별과 혐오를 겪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 기독교는 2010년이후 갑자기 ‘사랑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전광훈 목사를 앞세워 부채춤을 추고 성조기를 휘날리며 창당대회를 한 자유통일당은 “이슬람과 동성애로부터 한국 교회를 지켜내겠습니다” 라는 현수막을 거리에 내걸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왜 그들이 기독교를 지키겠다고 하는 걸까? 

안타깝게도 민족지도자를 배출했고 사회 정의를 펼쳐왔던 감리교단에서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징계하며 그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기독교가 해야 할 사도적 사명을 덮어버리고, 혐오에 매달리게 하고 있다. 그들은 사랑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이성애 정상담론 

여성학 연구자인 필자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이성애 정상이데올로기>이다.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가족을 정상으로 보았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최근 한부모가족, 조부모 가족 그리고 1인 가족들이 가시화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home sweet home’ 은 다시 그려지고 있다. 사랑도 그렇다. 자신의 삶의 이유가 부정당하는 것에 저항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갖춘 이들이 신의 메신저로 존경받았던 역사적 사실들이 알려지며 우리 사회는 다양한 젠더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다. 로맨스 각본은 다시 쓰이고 있다. 

이우연은 성소수자를 비난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퀴어의 개념이 지금은 자부심의 표현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환기시겼다. 청룡영화제에서 박진영은 여신같은 드레스를 입고 스모키 화장을 한 채, ‘sweet dream’을 부르며 지금 최고의 트랜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오고 가고 있었다. 이우연은 아가서의 퀴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퀴어스러운 성서, 아가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성애적 사랑을 죄로 여겼다. 섹스를 다음 세대를 낳기 위한 <필요악>이라고 보았고, 남성종교인들은 가슴에 불같은 열정을 일으키는 여성을 마녀취급했다. 정숙한 여성은 무성애자여야 했고, 예수는 섹스를 한적이 없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여겨지는 아가서는 노골적인 성애장면들, 그리움에 거리를 헤메며 연인을 찾는 장면들로 가득차다. 이우연은 아가서가 왜 퀴어적인가를 소개한다.
 
여성의 목소리로 쓰여진 아가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기록은 남성의 목소리로 되어있다. 여성, 아이들, 노예, 이방인과 같은 소수자들은 타자화되거나 시혜적인 시선으로 그려진다. 이우연은 아가서가 혐오하거나 숭배하는 언어가 아니라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는 것에서 퀴어성을 발견한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는 흰색 피부를 가진 여성에게 더 가치를 둔다. 술람미 여성은 스스로를 ‘검고 아름다우며’ 라고 표현하며 자기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가부장제의 규범에 도전하며 아름다움의 기준까지 확장한다. 

오랫동안 아가서를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은유라고 해석되어왔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우연은 아가서의 사랑표현은 성관계를 존중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부정해왔던 부분이다. 사랑하기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금지된 사회속에서 아가서는 달랐다(퀴어했다). 

이우연은 술람미 여인이 그 자체로 퀴어라고 말한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재산이고 성적 대상일 뿐이었다. 술람미 여성은 당대의 여성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현한다.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을 만나고 결합하는 것, 서로 끝없이 누리고, 하나님앞에 평등하게 설수 있다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퀴어의 모습이다”고 평가했다. 

사랑이 삶의 이유라면 자신의 사랑이 부정당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할까? 퀴어신학은 사랑이 부정당한 사람들의 생존 투쟁이다. 이우연은 ‘죽음만큼 두려운 이성애 정상담론’에 맞서고 있다. 
 

최형미 choihyungmee@hanmail.net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