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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기사승인 2024.05.20  23:10:14

이진경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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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Kingdom of the Planet of the Apes, 2024)

   
 

1968년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SF 영화 《혹성탈출》의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우주여행 도중 주인공이 우연하게 착륙하게 된 행성은 어쩐 일인지 지능이 인간처럼 발달한 유인원들이 지능과 언어를 잃은 인간종족을 사냥하고 지배하고 있는 행성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인원 무리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은 마지막 장면의 해변에서 모래에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 잔해를 발견하고 오열한다. 바로 이 행성이 그가 떠났던 지구였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엔딩은 당시 핵전쟁의 위협과 긴장 속에 있었던 미소 간의 정치적 냉전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1963년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68년의 영화는 미소 간에 핵전쟁이 벌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멸망하게 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자신의 영화 속에 녹여 넣었던 것이다. 단순한 과학적 상상을 뛰어넘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까지 보여준 《혹성탈출》은 그렇게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 이후 무수한 시리즈물로 등장했던 《혹성탈출》은 2011년부터 3부작에 걸친 새로운 리부팅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그 중간에 나타난, 훨씬 더 원작 소설을 닮은 2001년 팀 버튼의 리부팅과 달리 새로운 3부작은 말하자면 1968년 《혹성탈출》의 기원을 다룬 영화였다. 처음으로 고도의 지능을 얻게 된 유인원 ‘시저’는 바이러스로 인해 지능을 잃게 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대립과 갈등을 거쳐 마침내 동족들을 새로운 터전으로 이끌고 종의 화합을 이루며 숨을 거둔다. 이처럼 3부작 속의 시저는 성서 속 모세의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캐릭터였다. 이 거대한 3부작이 끝난 7년 후 다시 새롭게 탄생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시저의 죽음 이후 300년이 지난 시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미 시저는 전설이 되었고 그의 말들은 유산이 된 시대다. 그리고 인간들은 1968년 영화에서 처음 보았던 바로 그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야기는 단순한 자기복제식의 재탕이 아니라 보다 깊은 차원으로 진입한다. 유인원들의 강력한 왕국을 꿈꾸는 유인원 ‘프록시무스’는 시저의 전승을 이용한다. 원래 시저가 남긴 전승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였다.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프록시무스는 이중 전자만을 선택적으로 차용한다. 그리고 프록시무스에 맞서는 주인공 ‘노아’는 프록시무스의 폭정에 맞서며 포로로 잡혀간 동족을 해방시키려 애쓴다. 바로 이 해방 투쟁에 인간 ‘메이’가 끼어들면서 갈등과 위기는 점점 더 증폭된다.

흥미롭게도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는 선언은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는 전도서의 말씀을 떠오르게 하며,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선언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유인원 시저의 가르침에 대한 프록시무스의 선택적 차용은 예수의 가르침을 선택적으로 차용하여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교회와 신앙의 모습을 닮아 있기도 하다. 그렇게 프록시무스는 민주적인 공화정을 버리고 황제가 되기를 꿈꿨던 로마의 시저, 즉 카이사르가 되고자 한다. 라틴어 형용사인 proximus는 ‘가장 가까운’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답게 프록시무스는 자신의 영웅인 유인원 시저와 가장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시저의 말을 편의로 차용한 그의 선택은 그를 유인원 시저와 가장 먼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프록시무스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전승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경계가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의로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과는 정반대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내 멋대로 말씀을 선택하여 삶에 적용시키는 일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마지막으로 주인공 유인원인 노아 역시 그 이름을 닮았다. 그는 영화 속에서 단 하나의 의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그의 이름답게 물의 심판이 등장하고 노아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 와중에 오히려 인간은 여전히 인간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존재를 믿지 않고 적개심으로 대하는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유인원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는다. 인간 메이와 유인원 노아가 각각 하늘을 쳐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쓸쓸하고 불안하다. 과연 인간은 타 존재와의 공생에 대한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헤겔은 ‘인간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이 주장을 반박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진경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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