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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북지방회, 스페인 포르투갈 연수(1) "왕따 가우디"

기사승인 2024.05.23  20:43:19

박일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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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북지방 성지순례 - story 1

 

1. "출발"

그러니까.... 2014년 지방회 성지순례를 가본지 10년만에 지방회 단체? 성지순례에 동참했다. 사실 한 4-5년전에 가려고 했던 성지순례가 코로나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다시 추진되어서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새롭게 다시 성지순례가 준비되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결국은 대망?의 발걸음을 내 딛었다.

4월의 15일 잔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후, 우리 이천북지방의 한 교회에서 모여 38명의 인원들이 출발했다. 

하도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다들 약간은 상기된 표정과 설레는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나 또한 사실 패키지 단체여행을 선호하지 않아 10년동안 한번도 패키지여행을 가보지 않았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역시 단체여행의 꽃 "인원점검"을 필두로 공항에서 오가는 여행객들의 가운데서 부푼 마음을 달래어 본다. 

이번여행은 서나영 장로님의 익투스여행사와 함께 하기에 장로님께서 먼저 나오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사실 여러사람을 인솔해서 장기여행을 한다는 것이 참 힘드신 일일터인데 만나뵈니 좋아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 같았고 실제로 행복해 보이셔서 은혜롭기 까지... ㅎㅎ

 

2. "세미 여행 전문가?"

나름 여행 좀 다녔다고 자부하는게 "나"다.
뭐 짧지만 혼자서 세겨여행 비스무리하게도 다녀보고 했기에 누군가 물어보면 어깨 좀 으쓱하면서 이런저런 팁을 전수하기도 한... 뭐 그정도의 사람인데..
역시 겸손하지 않으면 안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여행이기도 하다.

항상 동반자가 있으면 물건 잘 챙기라고 강요? 하고 선생질?도 하곤했는데, 여행지도 아니고 공항까지 가는 버스에 핸드폰을 두고 내렸다. 문제는 이천에서 우리는 데려다 준 버스의 기사님이 전화를 다시 이천으로 돌아 가실때까지 받지 않으신 것이다. 결국 안절부절하다가 마음으로는 핸폰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속한 교회의 목사님께서 사찰 집사님께 부탁해서 다시 이천에서 가져다 달라고 해서 아슬아슬하게 출국할 수 있었다는... 

이후로 세미 여행전문가라는 자부심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3. "두바이의 기적?"

우리가 탄 비행기는 두바이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다. 두바이에서의 환승 대기 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두바이에 착륙할 때 정말 무섭게 착륙해서 착륙 후에 박수도 치고 그러더니만, 환승 비행기 탑승시간이 30분, 1시간, 2시간 길어지더니 4시간 정도를 대기하고, 비행기 타고 또 한시간을 대기했다. 그 당시 잠이 덜깨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유는 “기상악화!!!”라고 한다. 

 

   
 

 

   
비내리는 두바이 공항

 

내 기억에는 두바이는 사막?이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1년에 내릴 비가 우리가 대기했던 오전 딱 그시간에 폭우로 내렸다고 한다. 마치 부산에 눈 내릴때 처럼 모든 시스템이 딜레이가 되었나 보다. 근데, 이 두바이에서 이정도 폭우와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는데, 생각해보니 로또라도 사놓을껄 하는 아쉬움이 있을 정도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가 한 4시간 정도만 더 늦게 도착했어도 하루 이틀을 두바이 공항에서 갖혀 있어야 했다고 한다. 실제로 두바이공항에서 몇일 잡혀 있던 사람들의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오곤 했다. 5시간 정도 공항에서 잡혀있어 가야할 곳을 한 군데 못가서 아쉬웠는데 나중에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두바이 공항

 

여튼 결국 우리는 거의 밤 12시 비행기를 타고 24시간이 지나서야 스페인이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힘든 첫 출발의 여정이 있기에 이후의 여정이 얼마나 감사할지 기대가 되었다. 

코로나 이후 많은 지방과 교회, 사람들이 여행을 시작했다. 다들 힘든 시간과 일상속에서 잠시의 여유를 만끽해 보고 있다.

 


 

바르셀로나 그리고 왕따 가우디

 

1. "바르셀로나“

 

   
 


두바이의 기적?(1편에 언급한 두바이에 1년치 비가 오전에 내린사건)은 나비효과가 되었다. 원래 첫 성지순례단의 목적지는 몬세라트 수도원(바르셀로나에서 약 1시간 이내에 있는 산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검은 성모상으로 유명한 곳.) 이었는데, 무려 4-5시간 항공이 딜레이가 되어서 가지 못하고 바로 호텔로 직행했다. 그것이 오히려 긴 비행여정에서 지친 몸을 달랠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오히려 남은 일정을 더욱 상쾌하게 시작하게 한 것 같다.

 

   
 


바르셀로나의 하늘은 청명하다 못해 눈부셨다. 코로나 끝무렵에 우연찮게 가우디 전기를 읽다가 홀로 배낭을 메고 가우디를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내 기억에는 모든 물가가 너무 비싸 힘들었던 기억은 있지만 그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입을 다물게 하지 못했다. 다만, 너무 아쉬웠던 것은 가이드가 따로 없었던 여행이기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물어보지 못하고 어디가 중요한 포인트인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더욱 아쉬었던 것은 가족들 특히 아내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는데, 가우디를 보면서 뭉클해 하는 아내를 보니 아쉬움이 달래진다.

 

2. “인솔자 그리고 가이드”

패키지 여행에서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적어도 내가보기에는 인솔자와 현지가이드이다. 이미 한번 미루어진 여행이어서 하나님께서도 신경을 쓰셨는지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하셨다. 앞편에서 소개해드린 서나영 장로님을 인솔자로 출발한 것도 감사한 부분이지만, 현지 가이드이신 ‘제시카’집사님을 만난 것도 우리에게는 감사이자 행운이었다. 


 

   
▲ 익투스트래블 대표 서나영 장로와 필자
   
▲ 현지 인솔자와
   
▲ 현지인 참관 인솔자와

 

젊으신지 아닌지 나이를 도통 알아볼 수 없는(나중에 나이를 듣고 너무 놀랐다. 나이는 비공개ㅎㅎ) 유럽스타일의 한인 현지가이드이신 제시카는 여행 끝날무렵 목이 쉬어 있으실 정도로 최선을 다 하셨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38명이나 되는 인원을 그 복잡한 유럽을 골목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시는데 그 에너지가 38명의 인원보다 많았으며 또한, 이 가이드라는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 여실히 느끼게 해 주셨다.
 
인솔자이신 서나영 대표님이자 장로님도 역시 대단하셨다. 보통 현지 가이드를 만나면 각 여행지를 다닐 때 어디서 쉬시던가 하셔도 될듯한데, 평균 15,000보 이상 매일 걷는 일정에서 항상 앞뒤에서 일행을 챙기고, 사진도 찍어드리고 일정을 포스팅하고 제일 중요한 여행 전반의 일정과 상황을 매일 조율하시는데 감히 대단하시다 해드리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서는 감사하다는 말이 나올수 밖에 없게 하신다. 

인솔자와 가이드 두분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실때 묻어나는 행복감이 여행을 함께하는 인원들에게 얼마나 긍정의 효과를 일으키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여행좀 다녔다는 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본격적인 대망의 스페인-포루투칼의 행복여행을 시작했다.

 

3. “가우디”

다시봐도 가우디였다. 

1852년에 레우스라는 곳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폐병과 류머티즘 관절염을 지병으로 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어릴때는 죽을지 몰라 세례를 서두를 정도로 허약한 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슬람이 지배했던 곳에 있었던지라 이슬람 문화의 기하학적 특징들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은 사람이나 동물등 우상숭배의 여지가 있을만한 문양들을 쓰지 않았다.) 남성적 로마문화와 여성적 이슬람문화의 기하학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가우디는 완벽한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짓는 거의 모든 건물에 십자가를 올려놓았고 신앙의 초석으로 삼은 인물이다.

 

   
▲ 성 파밀리아 성당

 

그의 말로는 많이 안타깝다. 1909년 산업화로 인해 실업자가 된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교회권력과 정부에 항거하여 교회와 수도원을 불태웠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가우디는 더이상 개인 건물을 짓지않고 오로지 성가족성당의 건축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1925년에 성가족성당 공사에 더욱 매진하려고 성당지하 작업실로 거처를 옳겼고, 그 다음해인 1926년 6월 7일 30번 트램(전차)에 치여 사망하게 된다. 그런데, 사고 이후 남루한 복장의 가우디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신분증조차도 소지하고 있지 않아서 행려인으로 간주되어 고통속에서 사망했다. 뒤늦게 알려진 그의 사망속에 이제야 많은 바르셀로나인과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천재의 죽음앞에 머리숙였다고 한다. 


 

   
 
   
 
   
▲ 천정
   
 
   
▲ 한글 주기도문

 

4. “왕따와 구엘”

가우디의 여러가지 작품들을 시간상 다 보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정말 남달랐다 못해 아예 다른 무엇? 이다. 지난번 여행에서 느꼈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보다는 당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시기와 질투 혹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을지 상상이 되는 정도이다. 

그 당시 건축법은 직선위주로 딱딱 맞아떨어져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우디는 건축법을 위반하고 벌금을 내면서까지 그의 작품을 만들었기에 바로 옆의 건물과도 완전 딴판으로 생겨먹어서 누가보아도 티가 난다. 그러니 당시 건축가와 자본가들에게 얼마나 얄미웠을 것이며 얼마나 부러웠을 것인지 상상이 된다. 

가우디가 그렇게까지 해서 맘껏 하고 싶은 건축과 작품을 만들수 있었던 것은 그의 뒤에 ‘구엘’이라는 대형 자본가 우리말로 왕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엘도 보면 고생많이 했을 것이다. 돈은 대는데, 정말 난해하고 이상한 건물을 짓기도 하고, 망한 타운하우스(구엘공원)을 지어서 손해도 보고 하면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믿고 투자한 구엘의 선택은 가우디를 빛나게 했고 바르셀로나를 스페인에서 제일 잘 사는 도시, 전세계에서 가장많은 관광객이 오는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된 것 아니겠는가?

 

   
▲ 구엘의 집 앞에서

 

5. “신념”

가우디의 자신만의 신념은 이런 기적같은 작품들을 후대의 사람들도 누리게 해 주었다. 구엘의 신념은 가우디의 신념이 현실이 되게 하였다. 

생각해보니 내 안에 “신념”이라는 말을 되뇌어본지 너무 오래 된 듯하다. 가우디의 죽음은 왕따의 죽음처럼 보이지만, 가우디를 잃은 이들의 마음에는 가우디의 신념이 남아있다. 
고집과 신념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나 마음에 신념, 목회적 신념을 다시한번 돌아 볼 수 있는 은혜의 기회였음은 분명하다. 


 

   
▲ 구엘공원
   
▲ 구엘공원

 

ps. 이제 산티아고로 향한다.. 순례자의 발 끝이 서는 곳으로 
여기는 바르셀로나 

 

 

박일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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