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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왜 죄 없는 예수를 처형했는가

기사승인 2024.06.13  15:48:57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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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교회에서 식사하면서 집사 한 분이 내게 ‘빌라도는 왜 죄 없는 예수를 잔인하게 처형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이 나온 것은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27:24; 눅 23:4, 14, 22; 요 19:4). 복음서 기록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오로지 가야바를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의 책임으로만 돌린다.

예수가 모세의 가르침을 재해석할 뿐 아니라 병자의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고 그들이 중시하는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못마땅하게 혹은 이단자로 보았다. 특히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판하는가 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것은 유대교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다. 

더구나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마 26:63-64)라고 말했다. 가야바 무리는 그런 예수의 말을 사형에 처할 만한 신성모독이라 생각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그러면 예수가 처형당한 것은 순전히 유대교 지도자들의 충동질에 의한 것이고, 빌라도는 정말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야 한다. 


정치적 상황

유대인들은 서력기원 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 중에서 분봉 왕을 내세워서 유대인들을 통치하다가 로마가 직접 통치하기 위해서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분봉 왕이든 총독이든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임명한 황제의 눈에 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에 대적하는 유대인 반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분봉왕 헤롯이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성전 대문 꼭대기에 황금 독수리상을 세워놓았을 때, 로마에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의 최고의 신인 주피터를 상징하는 이 독수리상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우상이었고, 더구나 그것을 성전 앞에 세우는 것은 신성모독이었다. 헤롯의 말년에 이름난 현자 두 사람에게 선동된 젊은이들이 그 독수리상을 끌어 내렸다. 그러자 헤롯은 즉시 그 젊은이들과 그들을 충동질한 현자들을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독수리상을 끌어 내린 사건, 헤롯의 잔인한 처형, 백성들의 애도와 계속된 반로마적인 반란, 그리고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무자비한 폭동 진압. 이 모든 것이 다가올 비극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로마 당국이 총독을 통해 유대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총독의 주요 임무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과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반란이 일어날 경우 그것을 효과적으로 진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총독의 수족이었다. 오경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아론의 직계 후손들의 몫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헤롯 시대 이후에는 분봉 왕이나 총독이 대제사장을 임의로 임명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자기를 임명한 총독의 눈에 들어야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총독이 반란을 진압하는 정치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 막 1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 19:38) 혹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 12:13))라고 말하면서 “호산나”를 외쳤다. 

로마의 영토에서 주님이나 왕은 로마의 황제 하나뿐이라고 믿었던 로마 당국자들이 군중의 이러한 외침을 들었을 때, 그들이 예수를 로마에 대적하는 반역자로 지목할 만했다. 평소에 종교적으로 예수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가야바는 빌라도에게 예수를 정치범으로 고발할 호기회를 얻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가야바가 예수를 심문한 내용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가야바가 예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질문했다고 (막 14:61: 눅 22:66-70),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8:19-21). 

그러나 가야바가 총독에게 가서는 예수를 민란을 일으킬 정치범으로 고발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 간의 종교적인 갈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로마에 대적하는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심문은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빌라도 법정에서의 심문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반로마적인 위험인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고, 그 질문에 예수가 “네 말이 옳도다”(마 27:11; 막 15:2; 눅 23:3,)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로마에 대적하는 반란자에게 대한 형벌은 십자가형이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예수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 아닌가?


빌라도에 대한 잘못된 기록

마태복음에는 법정에 모인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예수를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 빌라도가 염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7: 24). 그러나 실상 그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를 환영한 군중과는 다른, 총독의 수족인 가야바가 동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빌라도가 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 염려했다는 기록은 당시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 

빌라도가 염려한 것은 “유대인의 왕”임을 자인하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일으킬 민란이었다. 그 법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말했을 때,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선택할 줄 알고 있었다. 민란을 일으켜서 투옥당한 바라바를 방면하고 예수를 처형했다는 사실은 빌라도가 예수를 바라바와 마찬가지로 민란을 일으킬 인물로 혹은 바라바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예수로 인해서 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거나,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다거나(요 19:12),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는 기록(마 27:18, 막 15:10)은 반란자를 색출하고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빌라도에게는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일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그의 기질이나 잔혹한 통치 방식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면 성경 기록자들이 왜 이렇게 역사적 사실과 맍지 않는 것을 기록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전에 오랫동안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잔혹하게 박해한 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박해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의 손에 참수당한 해가 서기 44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이 서기전 4년에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늦어도 서기 4년 전에 탄생했고 33세에 돌아가셨다면, 29년에 사망하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야고보의 순교는 예수가 돌아가신 지 15년 후의 일이다.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야고보의 순교 연대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순교보다 앞서 일어난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투옥,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순교, 8장과 9장에 나오는 바울의 기독교 박해 등은 예수가 돌아가신 지 15년 이내에 일어났다. 

그런데 바울은 57-59년 가이사라에 수감되었고 60-62년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했다가 참수당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64년에 순교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도들의 이런 순교로 보아서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한 잔혹한 박해가 야고보의 순교 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 모든 박해는 예수를 처형한 가야바와 빌라도의 경우처럼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자들의 유착관계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박해에 앞장선 사람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특히 로마 당국에서는 유대인들 간의 종교적 갈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에 관여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충성하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었다(행 12:3)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울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기록에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극심하게 박해했는지 잘 드러난다. 그는 스데반의 처형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끌어내어 감옥에 넘겼다(행 8:3).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을 만나면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행 9:1-2). 


복음서 기록 이야기

이처럼 유대교 지도자들이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박해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로마 당국자들보다 박해에 앞장선 유대교 지도자들이 훨씬 더 두렵고 증오스러웠다. 한 마디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원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의 책임을 전적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돌렸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인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은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가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자로 정죄당한 것은 예수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는 박해와 예수가 받은 박해 사이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 즉 종교적 문제 때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순전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종교적 문제 때문에 유대교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것처럼, 비폭력주의자였던 예수 그리스도도 단순히 종교적 이유로 유대교인들에게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빌라도의 역할은 수동적이었던 것으로 간주했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전해준 것”에 기초해서 성경을 기록했다. 80년경에 기록된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많은 사람이 믿음의 선배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처럼, 자기도 여러 가지를 미루어 살펴서 누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언급했다(1:1-3). 9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에서 요한 역시 전승된 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기록했다고 말했다(20:30-31, 21:25). 

복음서 기록자들은 그들이 “전해 받은 대로” 예수가 죽음에 이른 것은 오로지 유대교 지도자들의 박해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서 “전해 받은 대로” 발라도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마치면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가야바를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빌라도에게 가서 정치적 이유를 들어서 그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는 기록은 재고되어야 한다. 

당시의 정치·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를 대적하는 반란을 진압하고 그 반란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것이 그의 주요 임무였던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임을 시인한 예수는 로마에 대적하는 반란자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마가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빌라도가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말했을 리가 없다. 

그의 내심은 예수가 달린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세운 데서 드러난다. 로마에 대적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벌은 십자가형이었다.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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