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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예배는 안녕하십니까?(1)

기사승인 2024.06.22  21:00:45

원형수 paul95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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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 한글판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구약 성경에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고, 신약 성경에서만 10회 나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 판에서는 모두 36회(구약 26, 신약10회)나 나오는데, 이는 개역한글판에서 ‘경배’나 ‘숭배’로 번역했든 히브리어 ‘샤카’를 개역개정판에서 ‘예배’로 수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카(shachah)'와 '아바드(abad)'가 있고, 헬라어로는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 ‘레이투르기아’, ‘라트레이아’ 등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샤카(shachah)'는 머리 숙여 경배하다', '자신을 엎드린다' (시편 95:6-7)는 뜻이고, '아바드(abad)는 ‘섬기다’, ‘봉사하다(service)’는 뜻입니다(출 8:1 참조).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는 히브리어 '샤카(shachah)'를, ‘라트레이아’는 ‘아바드(abad)’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고,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는 헬라어 ‘레이토스’와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라는 뜻인데, 우리 말 성경에서는 ‘섬김’ 혹은 ‘봉사’로 번역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의 '예배'를 한자로 표기하면 '禮拜'인데, '예의를 갖추어 절하다'는 뜻입니다. ‘예배’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1)이라는 두 가지의 중심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

그런데 에베소서 1:3-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3-7).

이 구절은 창세전 하나님의 마음속에 간직하셨던 창조의 계획과 경륜과 구원과 섭리에 대한 계시입니다.(엡1;3-6, 3:2,9, 히10:9)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기독교의 예정론’이라 하여 ‘절대 예정론’, ‘예지 예정론’, ‘조건 예정론’을 말하지만 성경의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인 것입니다(요3:16). 에베소서 1:4절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란 말이 곧 ‘예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에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아시고, 그 경우 자신의 아들을 구원자(그리스도)로 보내, 그의 피로 속량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1:3절의 ‘흠’이란 ‘타락할 만큼 흠’으로, 자신의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그 ‘의지’로 타락할 수도 있게 창조되었다”는 뜻임니다. 다시 말하면 ‘로봇’으로 창조하진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1:5절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칼빈의 주장과 같이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예정하셨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요1:12, 3:16, 요일5:1)인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누가 만일 저에게 “예배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예배란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광의 찬미”라 할 것 것입니다.(엡1:6, 롬4:5)

이와같은 예정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린 최초의 예배자는 가인과 아벨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 출생한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의 소산물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그 이후 노아의 제사로 이어지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제사로 이어져 오다가, 400년 후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맺은 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장소 곧 성막과 성전 제사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파기함으로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잡혀가게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닫고, 눈물로 참회하며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인데(시137편), 이같은 예배가 바로 회당예배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합니다. 스룹바벨에 의해 건축된 성전은 400여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갖가지 유린 당하고, 훼손되기도 했으나, 헤르몬 왕조와 헤롯 대왕에 위해 복구되어 예수님 오시기 까지 성전제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성전 기물하나 남지 않고 약탈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조차 유린당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의 심정을 시편 기자는 분노와 슬픈 심정으로 탄식하며 노래한 것이 시편 74편과 137편입니다.

결국 스룹바벨이 건축한 성전은 법괘없는 성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법괘없는 성전에서 제사(예배)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사(예배)에 대해 제3 이사야는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사66:1-2)고 하고, 22절에서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1:8)고 하신 것은 그의 아들을 통해 건설하실 성전을 가리킨 것입니다(사66:1-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하자, 요한복음 기자는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고 주석을 단 것입니다. 

 

2. 예배의 세 기둥

신약시대의 예배는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 큰 변화를 맞게됩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모든 예전 활동의 종식을 선언하시고(마5:17, 롬10:4), 성전과 회당예배의 모든 뿌리를 자신의 사건에 근거하도록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날 밤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실 때,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눠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15-29) 하심으로 새로운 예배의 기초를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정확한 형태나 내용은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기초위에 새로운 예배의 형식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 예배형식이 마련되기도 전에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박해로 인해 사도들을 비롯한 제자들은 박해를 피해 흩어져서, 가정이나 동굴을 찾아 이십명 혹은 삼십명씩 분산되어 소집단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숨어서 예배하던 기독교인들이 공공연히 예배를 드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동굴속에서 소집단으로 모이던 기독교인들이 공적으로 모이게 되어 예배 장소와 성직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로마 정부는 고대 로마의 관공서로 사용되던 ‘바실리카2) 를 예배장소로 사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는 '빨리움(Pallium)'이라는 간단한 외투를 입게 하다가, 로마의 공무원들(의사나 법관)이 입던 ‘수단’이라는 복장을 입게하여 그것이 지금까지 사제복으로 이어져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전입니다. 유대교의 성전 제사와 바벨론 포로기의 회당 예배와 예수께서 보여주신 마지막 만찬 등을 통해 구체적인 예배 형식을 체계화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날 까지 전례되어 온 가톨릭 교회의 미사인 것입니다.

1천 여년동안 지속되어 온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종교 개혁가들로 인해 또 한차례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여러 개혁 가운데 예배의 개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대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의 미사(예배)가 라틴어로 진행되어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회중들은 구경꾼에 불과했고, 오직 성직자들만의 예배로 전락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종교개혁가들은 신약성경을 통해 초대교회의 예배 현장을 탐색하고,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초대교회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설교,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아뢰는 기도, 깊은 신앙에 바탕을 둔 찬송,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고백하는 성례로 예배가 드려졌다는 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또한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예배가 전례되어 오는 과정에서, 그 예배를 지탱하고 세워주는 세 개의 기둥3) 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의 기도가, “예배를 예배가 되도록 세워주는 기둥”임을 발견한 종교개혁자들은 세 가둥을 예배의 기본틀로 정하고, 가톨릭 미사의 ‘말씀전례’와 ‘성찬전례’ 예전에서, ‘말씀’, ‘기도’, ‘찬송’, ‘죄의 고백’을 갖춘 예배 형식으러 재 구성할 뿐만 아니라, 청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를 사용하여 집전하던 미사의 전통을 깨고 모국어로 대체하는 대 개혁을 감행한 것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예배의 세 기둥을 예배형식 뿐만 아니라 교리문답을 전개할 때도 여기에 맞춰 전개한 것인데, 마르틴 루터의 대교리문답서나 요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바로 세 기둥의 구조를 따라 작성함으로서 그 중요성을 각인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교단의 예전 예식서를 찾아보았습니다. 모든 교단의 예전 예식서를 다 찾아보진 못했으나, 현재까지 찾아본 예배의 예전 예식서에, ‘예배의 세 기둥’인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의 기도’가 포함된 예전 예식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총회 뿐이였습니다. 

2016년 2월 발행한 ‘예전 예식서’ 를 보면 “주일 공(公, Public) 예배의 순서와 요소‘에, 십계명 선포, 신앙고백(주기도)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이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감리교회에서 발행한 ’새 예배서‘ 조차 ’사도신경‘과 ’주의 기도‘는 포함되었으나, ’십계명‘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개신교회에서는 대체적으로 ‘찬양’ ‘말씀’ ‘기도’, ‘봉헌’ 등을 예배의 4대 요소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배의 서사적 구조로는 하나님의 초청(부르심)과 교회의 응답이라는 구조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모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들음’, 하나닙의 말씀에 따른 ‘사귐’, 세상으로의 ‘파송’ 순으로 전개됩니다. 

이처럼 4단계로 형성된 이야기로 예배에 초대된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인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예배의 서사구조라 부릅니다. 서사 구조란 문학적인 용어인데, 이야기가 전달되는 순서와 방법의 기초가 되는 뼈대란 뜻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가리킵니다.  

 

3. 예배순서에 담긴 뜻 

각 종파마다 예전과 예식이 다르고, 신학적 견해와 예전 차이로 함께 성찬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는 성찬에 대한 신학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오랫 동안 논의해 왔습니다. 그러든 중 1982년 남미에 있는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모여, 140여개 교파의 추천을 받은 40여명의 전문가들이 '신앙과 직제 위원회'란 이름으로 모여 12회 이상, 수정, 보완하여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리마 성만찬 예식서"입니다. ‘개회찬송’으로부터 시작하여 ‘분부의 말씀’과 ‘축복기도’로 이어지는 34개의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리마 예식서를 채택했으나, 너무 길고 두 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됨으로 그 다음 해인 1983년 제6차 WCC 총회에서 거행한 이후, 각 단체의 비판과 반대로 인해 현재까지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예배순서를 통해 예배와 예배순서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배순서’란 그 자체가 ‘말’이고, 그 자체가 ‘언어’란 점입니다. ‘예배순서’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의식인 동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예배순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예배자를 찾으시고 부르신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배의 부름을 통해,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음을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에는 ‘들음’의 장으로 들어갑니다. ‘들음’의 장에서는 하나님의 율법, 즉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말씀속에서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만들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의 등장인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 말씀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의 사귐 곧 교제를 나눕니다. 이 사귐과 교재을 통해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한 지체로서 재창조되어, 이 세상의 모든 백성을 제자 삼도록 세상으로 다시 보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는 예배순서가 바로 예배의 서사 구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배순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입니다. 설교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입니다. 구약에서 ‘예언자(Nabi)’4) 란 ‘나비(nabi)’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달하는 자란 뜻입니다. 우리 말로 풀이하면 맡길 ‘預’자와 말씀 ‘言’ 자를 써서 ‘預言者’ 곧 ‘代言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예언자는 맡은 말씀, 곧 맡겨주신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지, 자신의 신념이나 사상이나, 신조나 견해를 피력하거나, 주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가 되어애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야기 책입니다. 이야기 책인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심판’과 ‘부르심’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언약을 맺고,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이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른 흥망성쇠를 기록한 책이 구약성경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를 택하고, 새 언약을 맺고, 죽음 당하신 후 부활 승천하여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책이 신약성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는 단순히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와 구원을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치 두 개의 강이 흐르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 이야기지만 내면 속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설교란 내면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찾아 전하는 것이지. 설교자의 신념이나 신조나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안타갑게도 하나님의 이야기를 사람의 이야기로 바꾸고, 생명수가 풍부한 생명의 복음을, 설교자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는 물론 박제화된 교단의 교리로 바꾸어 선포되는 현실에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바꾸어 놓는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설교는 설교자 자신은 물론 청중들에게도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설교야 말로 오늘날 유튜브를 통해 전달되는 인문학 강의와 같은 의사 전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킴으로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 못하는 예배가 되게 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 것일까요? (계속)

 

 

각주

1) ‘인간의 응답’’

개혁교회 예배학자 존 버카르트(John Burkhart)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
프랭클린 지글러(Franklin Segler)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
에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던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폴 훈(Paul Hoon)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다.”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기독교 예배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라는 두 가지의 중심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바실리카
‘바실리카’는 내부가 끝에서 끝까지 텅 빈 강당으로 되어 있는 직사각형 건물로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도교 시대 이전에는 이탈리아의 시장, 관공서, 지붕이 덮인 야외극장, 강당 등 큰 지붕이 있는 공공건물을 가리켰으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된 후 ‘바실리카(Basilica)’ 예배 처소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바실리카(Basilica)’란 말을 건축학에서는 ‘건축 양식’과 ‘성당의 등급’을 정하는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되던 바실리카가 기독교의 성당으로 쓰이게 되면서  초기 기독교의 성당 건물양식의 원형이 된 것입니다. 한국의 바실리카 양식 건물로는 강화성당과 충북 청주시 수동성당을 꼽습니다.

 

3)세 개의 기둥
세 개의 기둥중 첫 기둥인 십계명은 신자들이 십계명을 낭송할 때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삶을 되짚어 보며, 하나님의 요구와 달리 살아왔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둥인 사도신경은 예배속에서 고백할 때마다, 신자가 무엇을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인지를 각성하게 했습니다.
   셋째 기둥인 주의 기도는 함께 낭송함으로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을 구해야 하고, 어떻게 구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기도로서, 신자는 예배속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그 목적임을 다짐하고 새기는 고백이였습니다. 

 

4)‘예언자(Nabi)’
사무엘상 9:9절은 “전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하느님께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선견자에게 가자고 하였다. 오늘날 예언자(nabi)라는 사람을 전에는 선견자(roeh)라고 하였다.”(공동번역)
   ‘예언자’(預言者, 영어: prophet)는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Prophet의 원어  인 그리스어 Prophetes는 '누군가를 위해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적절한 표현은 ‘대언자’에 가깝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야훼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한글개역판에서는 선지자, 공동번역성서(482회)와 표준새번역(479회)에서는 예언자로 번역했습니다. 

원형수 paul95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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