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세상 보는 법을 배우다

기사승인 2024.07.06  02:53:39

김기석 vorblick@dreamwiz.com

공유
default_news_ad1
article_right_top

세상 보는 법을 배우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정원 일에 몰두하고 있는 길벗을 찾아 먼 길을 다녀왔다. 화사한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의 정원은 정원사의 손길 덕분인지 정갈하고 가지런했다. 마가렛, 페튜니아, 으아리, 덩굴장미, 사계국화, 분홍낮달맞이, 삼색병꽃, 원평소국, 작약, 로벨리아, 알리움, 마삭줄, 자란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벌들은 잉잉 대며 날다가 꽃가루에 몸을 묻은 채 열락을 즐기고 있었고, 제비나비는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꽃에 사뿐히 내려앉곤 했다. 꽃과 곤충은 둘이면서 하나였다.

정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돌담에서 문득 생명의 기척이 느껴져 바라보니 팬지 꽃 한 포기가 싱그럽게 피어 있었다. 정원사가 가꾼 것은 아니지만 팬지는 그렇게 거기서 자기의 꽃 시절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자기 연민이나 비애 따위는 없었다. 뿌리 내릴 약간의 흙과 물기를 만나 생명의 진수를 드러내는 그 생명력이 경이로웠다. 바쇼의 하이쿠 하나가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냉이꽃 피어 있는 담이었구나”. ‘~구나’라는 감탄형 종결 어미가 이 시에 정취를 더해준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일체의 마음을 버렸기에 터져 나오는 감탄이다. 냉이꽃 한 포기가 무정물인 담까지도 생기 있게 만들고 있다. 이런 감탄을 촉발한 것은 ‘자세히 봄’이다. 할 일에 몰두하느라 빠르게 걷는 이들은 기적들 사이를 앞 못 보는 사람들처럼 스쳐 지나간다.

보는 행위도 여러 층위가 있다. 의지와 욕망이 개입되지 않았지만 눈에 그냥 보여지는 현상이 있는가 하면, 보려는 의지가 개입된 지각 활동도 있다. 어떤 경우든 본다는 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 정보를 과거의 경험과 기억과 관련시켜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널리 알려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시각 정보에 갇히지 않고 그 정보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을 일러 통찰이라 한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이들에게 그런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라고 했다. 세상의 모순에 눈을 감고 정신 승리하라는 말이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더 높은 시선을 얻으라는 초대이다. 장대한 것, 무한한 것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기에 우리 영혼은 가난하다. 시간의 폭력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분주함이 사회적 신분에 대한 표징으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한가로움은 덕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다.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며 사는 이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품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니, 오래 머물지 못한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동안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향유’(frui)와 ‘사용’(uti)을 구분한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향유는 가장 온전한 사랑함이다.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타자들과 허물없이 순수한 사귐은 불가능해진다. 사용할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의 가늠자로 삼을 때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빛이 없으면 볼 수도 없다. 내면의 빛이 어두워서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눈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본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살 때 기쁨과 감사는 가뭇없이 스러진다. 그것은 일종의 속박상태이기 때문이다. 가끔 인생의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죽음, 죄책감, 고통, 우연 등 우리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일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누구나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 당혹감은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지만 때로는 새로운 삶의 문턱이 되기도 한다. 고통을 통해 눈이 밝아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타자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지 않고, 그들의 숨겨진 눈물을 본다. 눈이 맑고 밝은 이들은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혐오감을 드러내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이들은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딱한 일이다.

(* 2024/05/17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김기석 vorblick@dreamwiz.com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