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당신의 예배는 안녕하십니까?(2)

기사승인 2024.07.06  20:42:40

원형수 paul9524@daum.net

공유
default_news_ad1
article_right_top

당신의 예배는 안녕하십니까?(2)

 

영국의 소설가요 사회 비평가인 Herbert Gorge 웰스(Wells)는 인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을 각색한 ‘무덤’ Herbert Gorge 웰스(Wells)의 '무덤'1)이란 단편 소설을 통해 당시 영국교회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서 세워진 신학이 예수님을 몰아내는 신학으로 발전하고, 예수 없는 신학이 만든 예수 없는 교회가, 예수 없는 신자를 양산하는 변질된 영국 교회와 신학을 사회비평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질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할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진정 예배의 참 뜻과 의미가 살아있는 예배라도 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1. 한국교회의 예배 무엇이 왜 문제인가?


한국교회를 방문하여 우리의 예배 예전의 현장을 살펴본 외국의 예배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는 ‘집회는 많은데 예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전 세계의 어느 교회보다도 모이기를 힘쓰며, 한 주간 동안에도 주일 아침 예배, 주일 저녁(또는 오후) 찬양예배, 수요일 저녁 예배(또는 기도회), 구역예배, 매일 새벽 예배(기도회), 그리고 가정 예배 등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국교회에 예배보다는 집회만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우리의 예배 예전 현장이 어떤 모습이기에, 우리에게는 집회만 있고, 예배는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일까요? 

저는 이들의 지적이 과연 타당한지를 점검하기 위해 우리의 예배 예전의 현장을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저를 비롯한 한국 교회가 예배의 전통은 물론, 예배에 대한 개념이나, 철학이나, 예배를 세워주는 기둥조차 상실한 채, 설교자의 신념이나 신조나, 목표만을 달성하려는 예배로 전락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였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며, 눈물흘리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형태가 ’열린예배‘입니다. 열린예배란 1973년 미국의 월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목사인 빌 하이빌스에 의해 처음 시도된 것인데, 그 후 릭 워렌 목사가 시무하는 새들백 교회와 북미의 빈야드 교회 등이 이 예배 형태를 도입해 시행함으로 한국교회에서도 1990년대부터 이를 적용하는 교회가 부쩍 늘어난 상태입니다. 

본래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예배라는 뜻에서 '구도자의 예배'(Seeker's Service)라고 불렀지만 한국 교회에 도입되면서 ‘구도자’라는 말이 낯설고 부자연스럽다고 여겨, ’열린 예배‘란 이름으로 바꾼 것입니다. 

열린예배의 취지는 기존 예배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 예배로부터 벗어나, 기존 신자들에게는 생동감을 주고, 처음 나온 불신자들에게는 능동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열린 예배'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린 예배가 왜,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의 원칙과 정의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내가 예배를 드리고 싶다 하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2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영과 진리)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창 3:9) 라고 물으신 것은 비록 타락한 아담이라 할지라도 그와의 관계를 잊지 않고 교제를 원하신다는 표지입니다. 아담 뿐만 아닙니다. 가인에게도 찾아오셨고(창4:9), 노아에게도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에게도 찾아오셨고, 모세에게도 찾아오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찾아오셨고, 우물가에 물길러 온 여인에게도,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청년에게도, 120명의 무리가 모인 다락방에도, 고넬로의 가정에도 찾아오셨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모든 자를 찾아오시지만 모든 사람을 예배자로 부르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간에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 형식과 접근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밝히고 있는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자를 찾아오시지만 모든 사람을 예배자로 부르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 만이 드릴 수 있는 축복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 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열린 예배의 의도가 전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형식이나 전통은 다른데서 찾아야 합니다.


2. 예배인가, 전도집회인가?


성경을 보면 두가지 형태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임재하심에 따라 부름받은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모임이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성령의 임재하심에 따라 장소를 불문하고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전파한 경우입니다. 

성경에서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42-46, 20:7, 고전10:16, 11:23-24, 16:2)란 표현은 ‘나를 기념하라’하신 말씀에 따라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예배 모임임을 가리키며, 이와 달리 베드로가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설파한 일이나,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복음을 전한 일, 사도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한 일 등은 예배모임이 아니라  전도집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행2:14-41, 10:34-43, 17:22-34). 

이러한 전도집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종교개혁 후 18세기에도 대각성 운동이라 하여 제4차에 걸쳐 20세기 말까지 계속 진행되어 왔습니다. 

한국교회에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의료선교사 로버트 하디 선교사 역시 제3차 대각성 운동 당시 무디(Dwight Lyman Moody)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선배 제임스 스카트 게일(James Scarth Gale)과 함께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입니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8월 원산에서 7명의 선교사가 모여 성경공부를 하는 모임에 강사로 초청을 받고 설교를 준비하는 중 성령의 임재하심을 뜨겁게 경험하고, 선교사들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 하디는 기도회를 인도하는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통회했습니다.2)  심지어 그 자리에서 선교비 유용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도 가감 없이 고백하자, 동료 선교사들 조차 통곡을 하며 회개에 동참했습니다. 

하디는 기도회 직후 맞은 첫 번째 주일(1903.8.30.일 주일) 예배 때, 원산교회 교인들 앞에서도 가감없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하디가 토착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자, 그 예배에 참석했던 모든 교인들이 가슴을 치며, 자신들 역시 그동안 하디 선교사를 마음으로 미워하고 속였던 잘못을 자백하는 통곡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는 원산 부흥운동의 시발이 되었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평양 대부흥운동과 조선선교의 폭발제가 되었고, 2000년 말까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부흥회와 사경회란 이름으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더욱 획기적 사건은 개신교 역사상 1973년에 열린 서울전도대회입니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 개최된 부흥운동은 연인원 334만 명이 모이는 대각성 운동으로 이어졌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설교도중 “누가 오늘부터 새롭게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자, 그날 당일에만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이 무려 5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집회로 인해 한국 개신교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도대회 이후 크리스천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때를 시점으로 교인 수가 수만명, 또는 수십만 명에 육박하는 대형교회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3)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집회, 또는 믿음의 진보와 결단을 촉구하는 부흥집회는 예배와 엄격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흥운동’, 또는 ‘전도집회’와 ‘예배’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전도집회는 믿음의 진보와 결단을 촉구하지만,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에 ‘예배’와 ‘부흥운동’, 또는 ‘전도집회’는 엄격히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900년대 이후 릭 워렌 목사의 구도자 예배란 이름으로 실시된 예배가 한국교회 예배의 주류를 이루는 형태가 되면서, 예배의 형식과 본질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예배의 전통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그 의미까지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라지의 비유(마13:24-30)에 나오는 밤중에 뿌려놓은 가라지와 같습니다. 

열린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보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비근한 예로 열린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단면은 성가대의 찬양이 끝나면,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드립시다”고 하는데, 왜 성가대를 바라보고 박수를 칩니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친다”면, 위에 계시는 하나님(행7:55)을 바라보고 박수를 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가대를 향해 박수를 친다는 것은 예배자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외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찬양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리이기에 거룩한 형식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됩니다. 운동경기때 부를 수 있는 응원가와 군사행진 때 부를 수 있는 행진곡과 장례식장에서 부를 수 있는 장례송과 어린 아기를 잠재울 때 부를 수 있는 자장가가 각각 다른 것처럼 예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리에서 부를 수 있는 찬송이 달라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영화를 감상할 때 영화의 장면과 배경 음악이 다를 수 없는 것처럼 예배 역시 예배에 맞는 음악이 있고, 맞지 않는 음악이 있습니다. 가령 찬송가 370장이나, 364장을 보십시오. 가사 자체가 은혜이고, 감동이고, 기도이고, 예배입니다. 

   (1)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2)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3)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후렴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런데도 이와 같은 찬송보다는 무분별하게 복음성가나 CCM(현대크리스쳔 뮤직)을 더 많이 부릅니다. 어떤 종류의 음악이라도 노래 안에 기독교적인 단어들만 들어가 있다면 모두 수용하고, 가사와 메시지만 좋다면 ‘록’이든, ‘랩’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청중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예배당 안이 온통 열광의 도가니가 될 때, 설교자는 마치 연극의 주인공처럼 강단에 등단하여, 청중이 좋아하는 내용들,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들, 행복추구와 성공담을 쏟아놓으면 흥분된 청중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간혹 자신의 감정에 북받쳐 눈물까지 흘리는 이가 있다면 그 날의 예배는 최고의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예배일까요? 

어느 교회에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첫날밤 맨 앞줄에 나와 앉은 할머니 한분이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눈믈을 훌쩍 거리는 것입니다. 이에 도취된 목사님은 할머니가 자신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눈물흘리는 것으로 여겨 더욱 열심히 선포했습니다. 

드디어 부흥회를 마치고 난 후 목사님은 할머니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오늘 설교에 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그러자 할머니의 대답이 너무 뜻밖이였습니다. “목사님 얼굴을 보니 꼭 한달전에 죽은 우리집 망아지 새끼 생각이 나서 울었습니다”. 말(馬) 상의 목사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할머니는 죽은 망아지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설교자의 설교와 청중의 생각은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연상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생각나게 한 것이 아니라. 죽은 망아지 생각이 났다는 것, 다시 말하면 청중의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는 그것이 과연 예배의 본 뜻일까요?

예배란, 예배자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떠 올리고,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심경이나, 자신의 처지를 보고, 거기서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이 광야의 샘물 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브엘라헤로이!’ (창16:8),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도망쳤던 야곱이 수십년 만에 형 에서를 만난 후,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33:10)라고 고백한 그 고백!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을 예배속에서 경험할 때 진정한 예배자이고, 진정한 예배의 승리자이며, 이로써 “내가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봅니다.


3. 예배의 회복 


예배의 목표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누림입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에베소서 1:3절은 ‘신령한 복’이라 소개한 것입니다. 신령한 복이란 “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엡1:6)이며, 다른 말로 바꾸면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란 ‘주일성수’가 아니라, ‘주일안식'4)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스트레스가 되고, 자주 돌아오는 것이 귀찮은 것이 아니라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주일안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일성수가 아니라 주일 안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학창 시절에 비교종교학을 배우면서 가톨릭은 물론 각 이단 단체나 심지어 불교 법회까지 참석하면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비교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깊은 인상을 받았든 것은 불교의 예불과 가톨릭의 미사와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였습니다. 

가톨릭의 미사는 성당 뜰을 밟으면서부터 미사가 시작됩니다. 성당에 도달하면 마리아 상 앞에서 성호를 긋고, 성당 입구에 놓인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그으며,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아멘” 이라 기도하고, 성당에 들어서서는 제대를 향해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한 후 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립니다.

불교의 예불은 새벽 3시 기상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은 일어나면서 이부자리를 정갈하게 챙기고 발소리조차 내지않고 법당을 향합니다. 그 이유는 잠든 새나 짐승이 깨지 않도록 소리내지 않고 걷는다는 것입니다. 법당에 다달으면 신발을 자로 잰 듯이 정갈하게 벗어놓고, 법당으로 들어가 좌우 나란히 앉아 예불을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언제부터입니까? 사회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시작합니다”라고 선언할 때 부터가 아닐까요?

여호와의 증인들은 제가 처음 방문했음에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든 사람을 만난 것처럼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아주 편안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들을 통해 신선한 느낌을 받은 것은 찬양(이들은 ‘노래’라 한다)이였습니다. 악기도 없이 무반주로 조용히 제창을 합니다. 그 가사 내용은 고전 찬송가의 내용처럼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쿼바디스라는 영화의 한 장면,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할 때에 흘러나오는 허밍코러스(Humming Chorus)5)를 연상시켜 깊은 울림을 받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느낀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웅장한 악기나 전문가들이 모여 찬양하는 찬양이 아니라 하더라도, 조용한 가운데 가사 내용 한구절, 한구절을 음미하며 부르는 찬양에서도 큰 울림을 받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였습니다.

제가 세 종파를 소개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옳고 그름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예배는 이대로 좋은 것인가?“라는 문제 의식에서 사례를 찾아본 것 뿐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묵상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심산과 예루살렘 중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로’란 무슨 뜻일까요? ‘영과 진리로’란 성경 번역본 마다 다릅니다.

개역한글판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라 하고, 개역개정, 새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어 성경, 쉬운 성경 등은 모두 ‘영과 진리로’라 하고, 공동번역은 ‘영적으로 참되게’라 하고, 현대인의 성경은 ‘영적으로 진실한 예배“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호크마 주석은 ‘영’이란 ‘프뉴마티’’(πνευματι)이고, ‘진리’란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인데, ’프뉴마티’란 ’성령‘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높고 깊은 부분”이며, ’진리‘로 번역이 된 ‘알레데이아’는 ‘성실’이나, ‘정직’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부합되는 것으로써, 예수안에 계시되는 ‘진리’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이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영과 진리로’란,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란 뜻으로 이해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장소를 물었으나, 예수께서는 “예배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자세다”란 뜻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예배해야 한다”라고 답한 것이라 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란,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는 것”(마22:37, 눅10:27)이란 말씀에서 찾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답이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답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과 “하나님께 예배함”이란 꼭 같은 것이라 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예배란, 예배자 모두가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준비된 예배를 드릴 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와 감동과 예비하신 하나님의 안식이 임한다고 확신합니다. 설교자나, 기도자나, 찬양자 모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연상하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청중 역시 하나님을 마음속에 그리며,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할 때, 참된 예배가 되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예배가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자 모두가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설교자는 설교를, 기도자는 기도를, 찬양자는 찬양을, 예배자는 예배를 한 주간 내내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준비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런데 저는 부끄럽게도 이제야 그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의 예배는 누구를 위한 예배였는가? 진정 하나님을 위한 예배였는가, 네 자신부터 생각해 보라!” 그런 뜻에서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해 봅니다. “당신의 예배는 진정 안녕하십니까?”

 

각주)

1) Herbert Gorge 웰스(Wells)의 무덤 : 왕비를 너무나 사랑한 왕은 왕비가 결혼한지 1년 만에 죽자 그를 위해 무덤을 조성합니다. 아름다운 무덤을 조성하고도 여전히 허전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동쪽에 자신을 상징하는 젊은 용사의 동상을 세우고, 서쪽에는 왕가를 상징하는 호랑이 동상을 세우고, 남쪽에 호화로운 별장을 짓고, 북쪽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성을 지은 후에야 대단히 만족해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무덤이 있는 공원을 바라보던 왕은 왕비의 무덤이 아름다운 공원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 신하를 시켜 당장 무덤을 파내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2) "나는 한국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았습니다. 의사라는 자부심과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데 왜 열매가 없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교만했습니다."

3) 2007년 옥한흠 목사의 큰 울림 : 2007년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대표설교를 맡은 고(故)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는 “주위를 보라. 교회는 날마다 회개한다. 그런데 왜 오늘날에는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회개가 형식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원산부흥운동의 핵심은 하디 선교사의 회개였다. 평양대부흥도 길선주 장로의 회개였다. 기독교의 회개는 자기 십자가다. 회개를 통해 내 가슴에 구멍이 날 때, 성령은 늘 그곳으로 임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보라. 교회는 날마다 회개한다. 그런데 왜 회개가 필요한가. 바로 회개가 형식이 돼버렸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도 묻는다. 진정한 성장이란 무엇인가. 기로에 선 한국 기독교를 향해 묻는다. 진정한 부흥이란 과연 무엇인가? 

4)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예배 속에서 안식을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예배를 통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주일성수라는 부담감이 예배의 기쁨과 보람을 찾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부담감으로 인해 예배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보다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란,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것”(엡1:3-6)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속에서 하나님이 성령안에서 내려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도록 주일성수가 아니라, 주일안식으로 예배의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5)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가 1904년 작곡한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허밍코러스(Humming Chorus)'. 쿼바디스란 영화에서 로마의 야외 경기장인 콜로세움에서 기독교인들이 로마병사들에게 끌려나와 굶주린 사자들에게 물어 뜯기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며 죽어갈 때 허밍코러스가 잔잔한 배경음악으로 깔리며 깊은 감동을 주는 장면입니다. 

 

 

 

원형수 paul9524@daum.net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