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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생일

기사승인 2024.07.07  00:18:16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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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목요일(7.4) 오후 생일잔치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이 가득 찼다.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이 자리에 다녀가지만 늘 빈 자리가 아쉽게 느껴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놀라운 풍경이었다. 시작할 무렵에는 앉을 자리가 부족해 여럿이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였다. 서로 눈인사를 하면서 놀라워하였다. ‘입추의 여지 없이’라는 관용어는 이럴 때 사용할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목마름을 느꼈다. 저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저녁나절 장맛비 소식을 앞두고도 기꺼이 발걸음을 했다고 한다. 꼭 50년 전에도 사람들은 목마름으로 이곳을 찾았는데, 위험한 감시 속에서도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며 간절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소수의 예언자적 행동을 한 목회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일 주인공은 ‘목요기도회’였다. 

  1974년 7월에 태어난 목요기도회 50살 생일은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무섭던그 시절, 그냥 ‘5가’로 통했던 역사의 현장은 유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의 산통(産痛) 그 자체였다. 지금은 광화문 광장으로 아우성의 자리를 옮겼지만, 예전에는 숨은 골방에서 기도하는 일도 벅찼다. 50년 전 역사의 증언을 듣자니 목요기도회 초기 한동안은 구속자 가족의 집을 돌아가며 모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올해 목요기도회처럼 50살 생일을 맞은 단체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을 통칭 1974년생(生)이라고 부른다. 공통적인 것은 시대의 지독한 아픔을 몸으로 겪었다는 사실이다. 1974년 출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저항 이전에 싹을 잘라내고, 짓밟으려는 독재정권의 폭력이 있었다.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한 당국은 4월 3일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북한의 사주에 의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면서 긴급조치 4호를 잇달아 발동하였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가 지목되었는데, 이듬해(1975.4.9.) 8명의 사형집행으로 귀결된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국내외로 커다란 파장과 분노를 불러왔다. 극단적 사법살인은 1심 재판 후 24시간도 안 되어 이루어졌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기 위해 기독교회관에서 목요기도회를 시작하기 직전, 5월에는 NCCK 인권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그해 12월, 목요기도회로 모인 자리에서 인혁당 관련 가족을 옹호하던 조지 오글 목사는 강제추방 당했다. 그런 역사적 분노가 배어 있는 1974년에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씨앗이 불모의 대지에 뿌려진 것은 자연스럽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용기 있는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한 것도 10월 일이다. 그해 겨울 동아일보 ‘백지 광고’는 겨울 한파 속에서 무언의 자유를 전파하였고, 침묵하는 대중의 양심을 두드렸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생일도 50주년이다. 그런 점에서 목요기도회는 대표적인 시대상징이 되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사망선고를 우려한 것은 국내뿐만 아니다.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잔뜩 위축된 서독에서도 긴급동의가 있었다. 1974년 삼일절, 독일에서 출범한 재독민주사회건설협의회(民建) 역시 지난 5월, 서울 조에홀에서 희년 생일을 기념하였다. 유학생을 중심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이 결합한 헌신 덕분에 세간(世間)에 민주주의와 통일의 길목으로서 독일을 기억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땐 그랬다. 고난받는 현실을 부둥켜안은 목요기도회와 그 시절 함께 뜨겁게 외친 이들 덕분에 비교적 자유로운 광장이 열렸다. 숱한 이들이 고문 값, 욕설 값, 눈물 값, 목숨 값을 호되게 치룬 후에야 비로소 맞은 생일은 명예로운 훈장이고, 빛나는 자랑이다. 그럼에도 아직 축하로 만족하기에는 때 이르다. 민주주의가 크게 신장하였으나, 역설적으로 목마름은 더 깊고, 크다. 여전히 기도할 골방이 필요하고,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고난받는 이들은 거리와 광장에 넘쳐 난다.  

  다만 목요기도회가 아픔으로 낳은 자식들이 이웃의 텅 빈 가슴, 고단한 삶의 자리 그리고 불의의 재난 현장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기도의 모범을 이어가고 있으니 고맙고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50년이 지난 지금, 비록 감시의 눈빛과 훼방의 방패와 거친 손찌검은 사라졌지만, 종종 사람들의 무심함과 오해 그리고 차별은 바늘보다 송곳보다 아프게 찌른다. 그래서 목요기도회는 계속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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