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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문학동네, 2011)
스마일링 샤이 가이(smiling shy guy).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내 동료에게 외국인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표정과 행동이 의도와는 다르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보니, 외국인들 사이에서 수줍은 모습으로 말 없이 어색한 웃음만 띄곤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외국인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한다. 외부에 자기를 능동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주 내 주위에 벽을 쌓고 그 뒤에 숨어 버린다.
쓰는 사람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책 띠지에 써 있는 것처럼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을 잃어 가는 한 남자의 만남에 대한 소설이다. 저자는 노벨상 수상자 강연에서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라고 이야기하며, 몇 개의 장편 소설을 쓰며 견디었던 질문들을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소개하였다. 세 번째 장편 소설 <채식주의자>를 쓸 때는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을, 그 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를 쓸 때는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을, 그리고 다섯번째 장편 소설인 <희랍어 시간>을 쓸 때는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견디며 글을 썼다고 전해준다.
두 사람의 시점이 교체되며 진행되는 <희랍어 시간>에서 독자들은 누구에게 감정이입하며 책을 읽게 될까 궁금하다. 보험회사가 계약자의 ‘두눈이 멀었을 때’ 보험금을 100% 지급하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시력의 상실은 말하는 능력의 상실보다 치명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한 여자가 말을 잃어가는 과정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읽다보면, 약자에게 쉽게 감정이입하는 나 같은 사람은 여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왜냐하면,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대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볼 수 있지만 말을 잃은 여자는 사회적으로 점점 고립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강이 이 소설을 쓰며 견디었던 질문을 떠올리며, 더 약한 이 여자가 소설의 어떤 지점에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는가 찾아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 여자와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하고,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 즉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 준다.
시력은 수동적으로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지만, 말하는 것은 자신의 것을 외부에 능동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하고,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녀의 성격이 어떻게 말을 잃어 버리는 것으로 연결되었을지 상상해 본다. 자신을 드러낼 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는 상대방에게 맡겨지게 된다. ‘말할 수 있었을 때에도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던 여자’는 자신의 말이 전달되어 의도와 다르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말을 잃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입을 열어서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리고, 언어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이 자신을 가두며 찌른다’는 여자는, 자신의 언어는 물론 상대방의 언어에 담겨 있는 불완전함, 거짓과 추함으로 인해 상처받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상처들이 그녀가 말을 잃게 만든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말을 통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말을 잃어 버렸지만, 여전히 타인의 언어로 인해 상처받고 있는 사람이다. 언어를 통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피하고, 상대방의 말을 통해 상처받기 싫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입을 다물고 외부와 담을 쌓는 것뿐이다. 언어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소외된다. 여자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계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한강은 이 소설을 쓰며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라고 묻고 싶었다고 한다. 여덟 살일 때 ‘사랑은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라고 생각했던 한강은 앞선 강연에서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라고 했다.
상처받은 나를 숨겨진 공간에서 끌어내어 다시 사람들 앞에 서 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사람과의 관계이다. 나의 가장 약한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담을 부수고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신뢰는 내가 먼저 약한 것을 드러낼 때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우리가 예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된 것도, 예수께서 가장 약한 모습을 겟세마네에서, 골고다에서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을 갖고 상대방에게 공감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불완전한 말에서 왜곡되지 않은 진심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책은 타인을 보듬고 온전한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본래의 역할을 곱씹어보게 한다. 내가 누군가가 말을 잃게 만들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본다. 그렇기에 언어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소통하기보다는 판단하고 가르치기 쉬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유진규 장로(반석교회)
유진규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