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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무평화통일연대 '평화칼럼'

평화는 우리 주님의 축복이고 또한 명령입니다. 고난을 겪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와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너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이와 평화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 성경은 명료하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일할 책무를 가진 사람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과는 다른 정황에 놓여 있습니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이후 남과 북이 전쟁을 치렀고, 75년 이상 지리적 분단, 이념적 분단, 정치적 분단, 경제적 분단, 문화적 분단, 그리고 군사적 적대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 통일을 소원하고 있는지 깊이 의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일을 노래만 했지 정작 통일을 위한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통일에 적대적인 이들이 교회 안에 부지기수입니다.

우리가 부단히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면 분단 45년 만에 통일을 일구어낸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독일이 통일을 이루어낸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우리는 평화의 축복을 거부하며 앵무새처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만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럴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70여 년 동안 교회에서 평화보다 증오를 배우고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독재자들이 지배하던 우리 사회는 냉전의 유산인 반공법을 금조옥조로 품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대못을 박아 두고 북한과의 대화나 접촉은 물론 모든 교제가 통제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법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화해와 평화를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과연 정상일까요? 사상의 자유, 교제의 자유, 연락의 자유, 서로 도울 수 있는 자유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차단하고 있는 이유는 증오와 불신 때문입니다. 정치적, 군사적 증오와 불신이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축복이자 명령인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왜 정치적, 군사적 증오의 대열에 합세하고 있는지 퍽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국 기독교가 평화를 위해 일하기보다, 평화는커녕 증오의 담을 쌓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반공주의를 외치며 이념적 증오를 부추기고, 심지어 백색 테러단과 같은 서북청년단 조직을 후원하고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조야한 종말론 해석으로 공산세력을 악마화하는 일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 일입니다. 심지어 부패 보수 정권의 하수인이 된 목사들은 우파연대를 조직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을 좌파 빨갱이라고 지목하는 형편입니다. 이렇듯 우리 안에서도 분열과 증오가 팽배한데 어떻게 우리가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성서에 담긴 평화 사상을 살펴보면 신약에서는 ‘에이레네‘, 구약에서는 ’샬롬‘ 사상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의 평화 사상은 상대를 증오하거나 불신하는 관계에서는 꽃피지 않습니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요? 사상적으로 다르면 잡아 죽여야 하나요? 공산주의자는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매도하면서 왜 통일을 노래하는 겁니까? 사탄은 대화나 타협의 대상도 아니고, 교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사상이 다르다고 하여 묵시적으로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사탄으로 규정하는 신학은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 할 사이비 신학입니다.

나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참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이념적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평화 사상, 평등한 세상을 강제하려는 공산주의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보다 더 평등한 세상을 일구어 낼 굳건한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산 위에서 그가 원수로 여기고 있었던 니느웨가 망하고 초토화되기를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분단된 독일에서 독일 교회 지도자들이 이념적 분단, 정치적 분단, 군사적 대립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 하나님 안에서 동독인들과 형제자매애를 나누어온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증오와 미움의 신학을 주장한 이들이 있었지만 다수를 설득할 수 없었던 소수였지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평화의 축복과 명령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동독과 서독 사이에도 철조망이 쳐지고, 서로 총을 들고 위협하며, 철조망을 넘으려는 사람을 사살하던 증오와 대립이 있었지만 독일 교회는 증오와 대립의 앞잡이가 되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분단과 대립의 시간에도 평화를 위하여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을 일러 빨갱이, 좌파라고 지목하며 매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독일 교회는 정부를 설득하고, 적대 정책을 넘어 동독의 인민들을 돕는 일에 공동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서신을 주고받고, 방문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두려움을 이기고 상대를 향하여 문을 열게 했고, 가난한 동독 정부를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지원함으로써 대립을 넘어서 협력자로서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했던 일을 왜 우리는 못하는 것일까요?

통일하기 10년 전 독일에서는 한 달 평균 246,000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하는 자유를 누렸고, 통일하기 2년 전인 1987년에는 무려 550만 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습니다. 그 해 약 3,000만 통의 전화 통화가 동서독 간에 있었고, 2,400만 개의 소포가 서독에서 동독으로 보내졌습니다. 이 시기에 동서독은 25만 명의 이산가족을 재결합하도록 도왔습니다. 서독 교회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동독 교회에 약 3,120억 원을 지원했고, 1964년부터 1990년까지는 약 1,080억 원에 해당하는 생필품을 동독 교회에 지원했습니다. 이들은 증오와 악마화의 길을 걷지 않고 평화신학의 기조를 초지일관 지켰던 것입니다.

분단 신학을 넘어 남북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하자고 하면 많은 이들이 가능한 일을 말하지 않고 가능하지 않은 이유만 둘러댑니다. 독일의 통일 이야기를 하면 독일과 우리가 다른 것을 먼저 둘러댑니다. 미움과 증오, 분단의 논리만 익혔기 때문입니다. 이제 생각을 바꿀 때입니다. 이념적 분단, 정치적 분단, 경제적 분단, 군사적 분단을 극복하려면 증오와 적대의 논리를 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신학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 길을 가려면 먼저 나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일 것이라는 요나의 눈이 아니라, 나의 원수까지 내 백성이라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박충구/ 전 감신대 교수,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 

박충구  pcknpax@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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