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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코리아의 주체이자 추진력은 ‘민’(People)

남북교류과정에서 민간의 역할
남북의 분단은 국토분단, 정부(국가)분단, 그리고 민족분단이라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고, 이에 의해 분단체제가 완성되었다. 분단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통일도 국토의 통일과 국가의 통일 그리고 민족의 통일이라는 세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의 통일이고, 이때의 민족은 민족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의 삶과 활동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민'(people)은 통일의 첫 단추를 꿰는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의 마지막 단추를 꿰는 의미도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과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등장, 그리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교류가 인도적 지원뿐만 아니라 학술과 문화, 체육, 관광, 종교,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1989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남북 간의 주민접촉이 이루어진 현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인도적 지원단체의 활동
남한에서 설립된 대북지원단체로서 초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우리민족)이다. 1996년 6월 21일에 창립한 ‘우리민족’은 남한의 천주교, 기독교, 불교계 등 6대 종단과 주요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국민운동조직으로 출발했다. ‘우리민족’은 정부의 민간차원 대북지원 창구다원화 조치에 맞춰 1999년 2월 대북지원 독자지원 창구로 지정되었다. ‘우리민족’은 초기에는 긴급구호방식으로 지원했으나 점차 북한의 인도적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농업과 보건의료 분야의 개발지원사업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이후 다양한 남북 간 교류협력사업을 병행 추진했다.

1998년 3월 정부가 민간단체들이 사업협의 및 모니터링 목적으로 방북하고 각종 협력사업을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허용함에 따라 대규모 방북이 이루어졌다. 대북지원민간단체를 통해 2005년 방북자의 규모가 3,995명으로 급증하고, 2007년 5월까지는 17,878명이 방북했다. 이 기간 국제옥수수재단, 굿네이버스, 남북나눔, 남북어린이어깨동무, 남북협력제주도본부, 월드비전, 우리겨례하나되기, 유진벨재단, 한민족복지재단 등이 주요한 대북지원단체로서 활동했다.

학술·문화예술단체의 활동
1990년대 남북의 학술교류는 주로 중국, 일본, 미국 등 제3국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학술교류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선 학술교류의 양태가 평양과 금강산, 서울을 왕래하며 직접 교류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직접 왕래의 횟수도 대폭 증대했다. 예를 들어 2000년까지 교육학술 분야 직접 왕래가 총 11건(46명)에 불과하던 것이 2001년에는 13건(76명), 2002년 15건(68명), 2003년 23건(378명), 2004년 23건(838명), 2005년 32건(273명), 2006년 35건(356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4년 7월에는 남북교육자대회가 개최되었고, 2005년 7월에는 남북문인대회, 2006년 10월에는 ‘6·15 민족문학인협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인도주의사업의 일환으로 의학, 농업, 정보 분야의 기술교류가 큰 진전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2006년 4월 평양에서 과학기술분야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문화예술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일찍 교류가 시작되었다. 1985년 9월 남북의 예술공연단이 이산가족 교환방문단과 함께 서울과 평양에서 처음 공연했다. 그리고 남북교류협력지침이 적용된 1989년 이후 2007년까지 총 310건(1,429명)의 문화예술인 접촉과 128건(2,153명)의 방북공연 및 6건(510명)의 남한방문공연이 성사되었다. 대표적인 것을 보면 1990년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개최된 통일음악회, 1999년 12월 평양에서 개최된 2000년 평화친선음악회, 1999년 9월 미술계 인사 11명의 방북 등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평양소년예술단 102명, 평양교예단 102명, 조선국립교향악단 132명 등 대규모 예술단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KBS교향악단 평양공연과 2002 MBC 평양특별공연, 2003년에는 KBS 평양노래자랑,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공연 등이 진행되었다. 2005년에는 SBS 주관으로 조용필의 평양공연이 이루어지고 가극과 오페라 공연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문화예술교류에서 남측에서는 민족문화교류재단, 남북문화교류협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 각종 문화예술계와 방송사 그리고 6.15 남측위원회 등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6.15 북측위원회와 민화협 그리고 교류에 직접 참여하는 민간예술공연단과 문예총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의 문예총은 북조선문학예술동맹을 모체로 발족한 북한의 대표적 문예단체인데, 이 산하에 작가·음악가·미술가·연극인·무용가·영화인·사진가동맹 등 7개의 부문별 동맹과 조선민족음악위원회·공연협회·예술교류협회 등이 포괄되어 있다.

종교단체(개신교, 천주교, 불교)의 활동
북한과의 종교인 교류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98년 이전에는 연간 10명 미만의 종교인이 방북했으나 2005년에는 68건(1,231명), 2006년에는 58건(788명)의 방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초기에는 소규모로 방북했으나 2000년 이후에는 종단·교단 지도자들이 단체로 방북하고 연합으로 사업했으며, 북한 내에서의 연합종교행사, 북한종교실태조사 등 순수 종교적 목적의 방북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89년에서 2007년까지 총 219건(1,410명)의 남북 종교인 접촉과 305건(6,077명)의 방북이 성사되었다.

종교단체들의 대북지원 및 통일 관련 활동은 기본적으로 ‘선교’ 또는 ‘전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서 인도적 지원 사업을 전개하였다. 불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 기본이고, 이에 더해 호국불교의 전통을 이어서 민족통일을 위한 각종 교류협력 사업이 이루어졌다.

북한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형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나 각종 종교 활동을 탄압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단체의 대북활동은 우선 각 종교단체가 대북교류사업의 파트너를 세우고 이를 강화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각종 종교단체가 종교적 믿음이 없이 단지 대외적 선전 및 교류창구의 필요성으로 설립한 ‘가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30여년에 걸친 남측 종교계의 공식적인 대북접촉창구는 북측의 종교단체였고, 이를 통해 북한에서 종교단체가 작지만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노동자, 농민, 경제단체 등 직능단체의 활동
민간단체들의 대북교류협력과 통일 활동이 강화될수록 노동·농민·경제단체 등 직능단체의 역할이 더욱 부각된다. 왜냐하면 교류협력이 심화되면 될수록 전문적인 능력이 요구되고, 나아가 남과 북의 접촉면을 확장하는 데 직능단체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남북교류 및 통일과정에서 각종 직능단체의 이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시민사회단체와 비교하여 전문성과 재정적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개발지원에 적합한 교류협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둘째 직능단체는 우리 사회의 각 분야를 모두 포괄함으로써 국민 참여를 더욱 유리하게 한다. 셋째 직능단체의 남북교류참여는 이에 해당하는 북한의 단체와 교류를 촉진시킨다. 물론 북한에서의 직능단체의 성격은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북한의 변화를 염두에 둘 때 이러한 교류협력은 반드시 요구된다.

(1) 노동자단체
직능단체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살펴볼 것은 노동자단체이다. 북한의 경우 노동자로 구성된 직능단체는 조선직업총동맹(직맹)이다. 직맹은 원래 일반 노조와 유사한 역할을 했지만 1960년대 이후 “노동계급의 대중적 정치조직, 당의 믿음직한 방조자, 옹호자”로 규정되었다. 북한에서는 30세 이상의 근로자는 당원, 농업근로자동맹원, 민주여성동맹원 등을 제외하고 모두 직맹에 가입해야 한다. 직맹 산하에는 산업별로 경공업노동자직업동맹, 상업일꾼직업동맹, 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 공무원직업동맹 등 10개의 조직이 있다. 그리고 지역별로는 도·시·군 직맹위원회와 공장 기업소 단위로 직맹 초급단체위원회가 있다.

이러한 직맹에 해당하는 우리의 단체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노총은 2011년 기준 노조 3,300여개와 조합원 89만여명, 26개의 산업별 노련, 16개 시·도 지역본부, 54개 시·군 지역지부를 두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조합 2,000여 개에 총 조합원수 70여 만명, 산별 노조 23개, 지역본부 16개, 지구협의회 44개이다.

노동자의 남북교류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은 북한의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 렴길순과 남한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갑용이 합의해 1999년 9월, 평양에서 ‘통일염원 남북한 노동자축구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민주노총 대표단과 축구단 27명은 평양에 도착해 양강도경기장과 김일성경기장에서 20만 명의 관중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의 축구단과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2004년 5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북한의 직맹과 함께 평양에서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를 개최했다. 이어서 2007년 4월 29일에는 북측 노동계로서는 최초로 리충복 6.15선언실천북측위원회 부위원장과 원형국 조선직업총동맹(조선직총)부위원장 그리고 축구선수단 20여명 등 60명이 김해공항을 통해 창원에 도착했다. 이때 분단 이후 최초로 남한에서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6.15선언공동실천남측위원회 노동본부의 민주노총(위원장 이석행)과 한국노총(위원장 유재석)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2) 농민단체
농업과 관련된 직능단체는 북한의 경우 조선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이다. 농근맹도 직맹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이익을 위한 단체에서 당적 영도를 받는 사상교양단체로 역할이 바뀌었다. 농근맹은 “협동농장원들과 국영 농목장을 비롯하여 농촌경리부문에 직접 복무하는 국가 기관, 기업소들의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을 망라”한다. 농근맹은 중앙조직 외에 지역조직이 있다.

북한의 농근맹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직능단체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다. 전농은 “농민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리와 복지실현을 위하여, 다가오는 통일시대의 우리 민족의 자주적 경제건설을 위하여 전국의 9개 도연맹과 100개 시군지역의 농민회가 모여 활동”한다고 밝히고 있다. 전농은 2001년 3월 6일에 북녘못자리용 비닐 출항식, 동년 7월 17일에 남북통일농민대회, 2007년 12월 5일에는 통일농업실현 대북 쌀지원법제화촉구 통일쌀 인도인수식 등을 가졌다.

한편 농업부문에서의 남북교류협력을 위해 2004년 8월 20일 ‘남북농업협력추진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정부와 민간의 상호협력 및 정보교류를 통해 자율적인 남북농업협력 사업을 활성화하는 한편,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대북지원 및 남북농업협력 방안의 모색이 목적이었다. 여기에는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 한국농기계공업협동조합,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현대아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북한경제전문 100인포럼, 통일농수산포럼 등 7개의 민간단체와 농업 관련 정부기관인 농촌진흥청과 산림청, 농림부 산하 유관기관인 한국농촌공사, 농수산물유통공사, 농협중앙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이 참여했다.

(3) 경제단체
경제단체는 피폐한 북한경제를 재건하고 남북공동번영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2000년 이후 남북교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0년 5·24조치로 남북 간의 모든 교류협력사업이 중단되었지만, 2007년 현재 남북경협에 참여한 기업수는 500여 개였고, 이 가운데 위탁가공업체는 100여 개 업체였다. 이들은 단순교역, 위탁가공, 투자사업(협력사업) 등 3가지 분야에서 다양한 품목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경협의 품목은 기존의 농수산물 위주에서 전자, IT, 교통, 통신, 금융, 물류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민간의 남북경제교류를 위해 가장 포괄적으로 조직된 것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주관으로 통일부장관의 허가를 받아 설립된 ‘민간남북경제교류협의회(민경협)’이다. 2003년 12월 19일에 창립된 민경협은 󰊉남북경제교류의 대북창구 역할 ②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대정부 정책개발 및 건의 ③대북 경제협력사업 관련 기업 간 분쟁 또는 기업과 정부 간 역할 조정 등을 목적으로 했으나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무역협회 등의 경제단체들과 통일부, 중기청 등의 경제 관련 정부부처, 그리고 수출입은행 등 금융기관과 KDI 등 연구기관이 각종 남북교류협력단체를 조직했지만 무역협회의 남북투자교역협의회, 수출입은행의 통일경제연구협회 외에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한편, 북한은 본격적인 남북경제교류협력에 대비해 1998년 내각 무역성 산하에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를 조직하였다. 민경련은 1990년대 중반까지 남한 기업들의 대북투자와 교역을 담당했던 다양한 대남경협창구를 일원화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2004년 7월 이후 내각 산하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에 소속된다. 이후 한동안 민경협은 산하에 남측과의 경협을 담당하는 민경련, 개성공단을 관리하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금강산 및 개성관광을 담당하는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담당 부서, 철도·도로건설 등을 담당하는 광복총회사 등 남북경제회담, 특구, 경협사업을 망라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공식적으로 대남 경제협력을 통합 관리해온 내각 산하 민경협을 폐지하고, 민경련이 담당하고 있던 남측 민간단체들을 대부분 민화협으로 이양했다. 2011년 11월 현재 민경련이 담당하고 있는 남한의 민간단체는 남북나눔운동과 월드비전 두 곳뿐이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의회와 정당의 역할
남북교류협력과 통일과정에서 국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시사점을 얻기 위해 독일의 연방의회가 통일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의회와 정당의 활동이 동서독 간 접촉, 교류, 협력을 지속하는 가교가 되었다. 동서독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경우에도 서독의회와 정당들의 다양한 탈이념적 활동이 바탕이 되어 양 독일 간 관계는 단절되지 않았다. 그리고 독일의회는 통일문제를 대중화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확산하는 데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둘째, 서독 의회에서 활동하던 정당들 사이의 이념적 다양성과 차별성은 동서독 간의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즉 의회가 사회 내의 다양한 의견을 결집하고 이를 대표하는 기능을 충실히 한 것이 통일과정에서 이념적 혼란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했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서독 정당들 간에 존재한 이념 및 정책의 다원성이 서방편향의 서독 정치체제가 현실주의 및 탈이념적 외교를 전개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서독 의회 내에서 활동하던 정당들은 통일과정 단계별로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통일준비단계에서는 서독사회의 안정화와 독일의 평화정착에 기여했고, 통일추진단계에서는 서독 각 정당들이 동독정치세력과의 연대를 구축·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 동독 접촉활동을 하였으며, 통일 이후 사회통합단계에서는 동독지역 주민들의 정치참여를 선도하였다.

넷째, 서독 의회가 지닌 다원적 성격으로 인하여 동독정치체제가 붕괴하는 가운데 발생한 정치세력의 세분화현상을 통일독일 사회가 혼란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통일독일의 의회는 통일사회의 정치사회적 통합촉진에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남북관계에서 국민을 대의하는 ‘국회’의 역할 강화
이상의 독일 통일경험과 지난 20여 년간 우리나라의 대북·통일정책의 경험을 종합할 때 통일과정에서 국회(입법부)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대통령 중심의 행정부가 아니라 정당 간 타협을 도출하는 입법부가 대북·통일정책의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 군사독재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정치는 입법부가 통법부로 전락되고 대통령 중심의 행정부가 모든 정책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대북·통일정책에서 특히 심했는데, 이것은 1972년 7·4공동성명 이후 기밀과 공작을 담당하는 정보부(안기부, 국정원)가 남북대화와 교류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대북통일정책에서 일반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입법부, 심지어 통일부 등 행정부처도 소외되기 일쑤였다. 또한 5년 단임의 대통령제에서 발생하는 정권교체는 대북통일정책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현저하게 훼손시켰다. 따라서 대북·통일정책의 국민적 합의와 지속성 및 일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행정부가 아니라 입법부(국회)가 대북·통일정책을 주도해야 한다.

우선 국회(입법부)의 대북·통일정책 주도는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한 구체적 입법으로부터 시작된다. 특히 기존에 이룩한 남북 간의 각종 합의를 법제화시킴으로서 남북회담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여와 야, 개혁과 보수의 타협과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북통일정책의 법제화는 5년 단임의 정권교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적 안정성을 제공할 것이다.

둘째, 미국의 의회가 자주 사용하는 것처럼 특정한 시기 특정한 정책의 수립을 위해 국회가 행정부에 정책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즉 행정부에서 대북통일정책을 수립해서 국회에 보고토록 하고, 국회가 이것을 심의하고 구체화해서 입법형태로 행정부에게 정책지침을 제시할 수 있다. 대북·통일정책의 기조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까지 국회가 관여할 때 정권의 교체에 의해 큰 폭으로 흔들리지 않고 국민합의의 대북통일정책을 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야가 모두 공감하고 있는 5·24조치의 해제를 행정부의 판단에 남겨둘 것이 아니라 여야가 합의해 이를 해제하는 법률을 만듦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

셋째, 국회 내 및 정당 간의 이념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독의 경우 기민당과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정당들이 활동함으로써 동독 및 동서유럽의 국가들과 교류협력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서독주민 및 동독주민의 정치적 의사와 힘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 남한에서 보수적인 새누리당과 개혁적인 민주당계열 그리고 소위 진보당계열들이 각자의 다양한 이념에 맞게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일을 추진하는 정치체로서의 ‘통일코리아 민회’
통일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창조적 과정이라면 통일의 전 과정을 이끌어가며 이를 통합하고 조정해낼 새로운 국민적 힘이 필요하다. 현재의 대통령자문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의 심각한 불신을 받고 있는 현재의 국회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단원제 국회시스템은 건국에 준하는 통일과업을 추진하기에 한계가 있다. 국민 모두가 국회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지금, 국민이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하원’으로서의 ‘통일코리아 민회’(약칭 민회)는 정치발전과 통일추진에 새로운 힘이 될 것이다. ‘하원’으로서 ‘민회’가 구성된다면 현재의 ‘국회’는 ‘상원’으로 그 성격이 재규정될 것이다.

조선 말 대한제국이 수립되었을 때, 이것을 근대적인 입헌군주국가로 만들기 위해 독립협회가 주도하여 아래로부터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의회(상원)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다. 이것은 수구파와 외세의 탄압으로 실패했는데, 이때의 의회설립운동이 성공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그 핵심은 국민을 대표하는 임시의회, 즉 의정원이었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을 전후하여 건국준비위원회가 각 지역별로 구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한 적이 있다. 유신시대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것이 만들어졌지만 이는 독재자에 의해 위로부터 만들어진 독재의 도구에 불과했다. 오늘날 헌법상의 기구로 활동하고 있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아래부터 국민적인 의사를 결집하는 국민운동체가 아니라 형식적인 자문기구로 전락했다. 지난 7월에 출범한 ‘통일준비위원회’ 역시 대통령이 주도하여 정부의 통일의제를 확산하기 위한 자문기구에 불과하다.

통일추진의 새로운 힘으로 규정되는 ‘통일코리아 민회’는 각 영역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약 500명 정도로 구성될 수 있다. 이때 ‘통일 민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새코리안(New Korean), 통일코리안(United Korean)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코리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창의적 정책을 도출하고, 각 지역과 영역에서 통일코리아를 건설할 사람들이다. 우리 헌법이 단원제를 규정하고 있기에 헌법이 양원제로 개정되기 전에는 ‘민회’가 하나의 자발적인 정치운동체로서 통일코리아에 관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각종 활동을 조직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는 ‘사실상의 의회’(de facto assembly)인 ‘민회’는 헌법개정을 통해 양원의 하나로 ‘법적인 의회’(de jure assembly)로 정립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통일코리아는 하원으로서의 민회와 상원으로서의 국회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가진 양원제 국가가 될 것이다.

결국 ‘통일’이라는 거대한 민족사적 과업은 민족의 거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이는 조선 말의 만민공동회와 의회설립운동처럼 새로운 의회로서의 민회를 설립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통일이라는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일 뿐만 아니라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열망을 담기 위한 현재적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지난 30여년의 남북관계를 볼 때 통일코리아를 비전으로 하는 ‘민회’를 통해 국민들의 새로운 정치에너지와 통일건국의 역량을 결집하지 못한다면 통일은 불가능하다. 통일은 아래로부터 거대한 국민들의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과정이자 새로운 국가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이다. ‘민회’라는 국민의 정치적 힘의 결집체를 통해 ‘국민’(people)은 통일코리아의 주체이자 추진력으로서 새로운 통일코리아를 건설해갈 것이다.

배기찬/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장

배기찬  baekich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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