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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심주일 목사의 탈북일기(15)

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셨고 세밀하게 나의 인생을 인도해주셨다. 특히 평양을 떠나 이곳 통화시까지 오는 동안 하나님은 직접 나와 동행하셨다. 대한민국까지 가려면 아직도 무슨 일을 어떻게 경험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교회 문 앞에 서고 나니 '이젠 됐다'는 안도감이 느껴지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하나님을 만나고,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통화시까지 왔지만, 그리고 교회 문 앞에 서 있지만, 정작 나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이 교회로 들어가야 했다.

교회로 인도하신 하나님

교회는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문을 당기는 것이 아니라 밀어야만 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는데도 안에서는 누구 하나 인기척이 없었다. 교회 마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교회 마당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마당 옆 비교적 큰 건물에 불이 켜져 있기에 다가가서 창문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날이 주일인지, 수요일인지 아니면 금요일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창문으로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곳은 분명 예배당이었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 그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시 반대편 건물에 가보니 실내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제일 큰 아이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조선에서 왔는데 어른들에게 좀 알려주거라." 내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빠르게 뛰어나가 어른들에게 알렸다. 예배를 드리는 중인데도 아이가 들어가고 조금 있으니 30대 중반의 여성이 그 아이와 함께 들어왔다. 그 여성은 나에게 "지금은 예배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예배당으로 갔다. 교회를 섬기고 있는 전도사님의 사모님인 것은 조금 후에 알게 되었다.

예배가 끝나고 전도사님의 사모님을 통해 조선에서 웬 사람이 왔다고 들은 성도들은 전도사님과 함께 와르르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북한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 많다며 이것 저것 계속 물어보았다. 어떻게 압록강을 건넜으며 또 여기 통화시까지 오는 데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는 등등 계속 물어 보았다.

나는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시작하여 통화시까지 오는 과정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지 않고 자세히 말했다. 평양을 떠나 압록강까지 오는 과정과 평양에서 성경을 읽은 이야기, 압록강 대안에서 기도를 드린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직업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만났고 장차 북한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간다는 나의 소명은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가 조선에서 큰 간부로 일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고 평범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너무나도 힘이 들어 이렇게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압록강을 넘어 중국 땅에서의 나의 행적을 전부 들은 그들은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거니와 일어날 수도 없다며 놀라워했다.

융숭한 대접

몇몇 사람들은 식사를 준비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갔다가 다시 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나 양말과 신발을 가져왔다. 잠깐 사이 내 앞에는 많은 의류품이 쌓였다. 북한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순간 '중국은 모든 것이 풍부하니 사람들의 인심도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한참 후에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연이어 그들이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맛있게 하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게 물었다. 전부 답변을 하고 교회에서 마련해준 방에서 정말로 마음놓고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이것이 중국에서의 세번째 밤이었다.

지금도 그 교회를 한 번 가보고 싶다. 그들은 그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오늘의 내 모습을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아무 걱정 없이 정말로 평안했다. 다만 이제는 중국 땅인데 중국말도 배워야 하겠다 싶었다. 어릴 때 중국 지원군들이 우리 마을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하던 말 중에 아주 쉬운 말이라도 혹시 없을까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런데 딱 하나 '쓸라(죽었다)라는 말 밖에는 도저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양계장에서 닭을 치다

교회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마음도 몸도 가뿐했다. 더 갈 곳도 없이 여기서 무엇인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마음은 더없이 즐거웠다. 어젯밤에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던 교인들 중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분은 그 교회의 어떤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40대 정도의 나이였다. 그분은 이제 나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국땅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루빨리 대한민국으로 가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없어서 분명하게 답변을 하지 못했다.

옥란이란 이름의 그녀는 자신의 남편은 통화시 시청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그녀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양계장이 있는데 우선은 거기서 일을 좀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에게 제안했다. 나도 깊이 생각을 해 보았지만 대한민국으로의 출로를 찾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고 중국말도 배워야 할 것이며 돈도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중국의 호구도 만들여야 한다는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양계장에서 일을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일체 식사는 양계장에서 보장하고 한 달 월급은 중국돈으로 200원에 계약을 했다. 계약이라야 문서 계약은 없고 그저 그분의 중계로 구두계약을 했다. 이 문제가 교회에도 상정되어 그 다음날 버스를 타고 교회 성도들과 함께 양계장을 찾아갔다. 양계장은 통화시에서 좀 떨어진 산골마을에 있었다.

닭고기 먹고 싶은 소원이 이루어지다

1998년 4월 1일부터 양계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을 특별히 일을 지시받지 못했고 이런 일 저런 일 내가 직접 찾아서 했다. 양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한 10여명 되었고 모두가 한족이었다. 사장이 있고 그 사장의 사촌동생이라는 사람이 그 양계장의 생산과 판매부터 재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사장은 돌아다니면서 사료를 얻어 오는 일을 주로 하는 것 같았다.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직접 찾아서 하자니 별로 떳떳하지 못했다.그래서 며칠 동안 한족들이 닭사료를 만들고 계란을 거두어 상자에 포장하고, 죽은 닭은 제때에 털을 뽑아 깨끗이 선별하여 판매하고 이틀에 한번 닭똥을 쳐내고 하는 공정을 살펴보니 얼마든지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사장에게 나도 직접 닭을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1872마리의 닭을 나에게 맡겨 주었다. 그러나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을 잘 못하면 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수치를 당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나는 우선 일과표를 만들었다. 새벽 4시 30분이면 기상해서 기도를 30분 한다. 다음은 모든 닭들에게 물을 새롭게 갈아주고 사료를 준다. 그리고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는다. 다른 한족들은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일어난다. 아침밥을 먹은 다음에는 성경을 읽는다. 그 다음은 한족들과 같이 옥수수를 분쇄한다. 그리고 사료를 배합하여 만든다. 오후에는 계란을 수집하여 포장 및 판매가 이루어진다. 저녁 9시에는 잠자리에 눕는다. 자다가 밤 1-2시 정도에 일어나 제주극동방송을 통해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다. 다시 조금 잠이 들었다가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정말로 바쁜 일과였지만 조금도 어김없이 지켰으며 항시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한족들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중국어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말로 수첩에 적었다가 저녁이 되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완전히 통달하여 내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물컵을 보면 중국말 발음을 물어본 뒤에 중국말로 '뻬이'라고 하면 우리말로 수첩에다 '뻬이'라고 썼다가 저녁이면 완전히 통달하는 방식으로 중국말을 배워 나갔다.

그런데 양계장에서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자나도 닭고기 요리를 구경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나 저제나 닭고기가 먹고 싶은데 절대로 닭요리를 해주지 않았다. 원래 나는 닭고기를 좋아한다. 한번은 평양에 있을 때 중앙당에 있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그때 어쩌다 생긴 닭을 삶아 놓고 술을 마시면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야, 이거 아무 때고 먹고 싶을 때 닭고기 좀 실컷 먹지 못하니"라고 하면서 술을 마셨는데 비록 술 마시는 자리에서 한 말이라도 하나님은 다 들으신 것 같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그렇게 좋아하는 닭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솔직히 나는 이렇게 미리 고백했다.

그런데 이들은 닭요리를 해주지 않는 것이다. 닭고기는 너무 먹고 싶은데 닭을 옆에 놓고도 먹지 못하니 너무나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하루만 더 참자. 그래도 닭을 삶아주지 않으면 무슨 비상대책이라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그날 닭볶음탕을 해주는 것이다. 당시 주방에서는 중국인 어머니가 밥을 해주었는데 그날 먹은 닭볶음탕의 맛은 정말 기가 막혔다. (계속)

<부천 창조교회 담임목사>

심주일 목사의 ‘탈북 일기’는 책 ‘멈출 수 없는 소명’(토기장이)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요약, 연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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