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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베트남은 지금..왜 ‘40’일까?

2015 을미년을 맞이하는 베트남과 한국
2015 을미년. 베트남 통일 40년, 한반도 분단 70년, 독일 통일 25년이 되는 해이다. 베트남 전국 주요 거리와 교차로에는 “40”이라는 대형 숫자로 화려한 장식을 해 놓았다. 이 대형 장식이 호치민시에는 베트남 통일의 상징인 통일궁 앞 레쥬언(Lê Duẩn) 대로에 3개가 있으며, 호찌민시의 상징인 벤탄(Bến Thành) 시장 앞 교차로에도 설치되어 있다. 이 “40”이라는 장식과 함께 분단 기간 남, 북의 국기와 통일 베트남 국기 대형 장식을 레쥬언(Lê Duẩn) 거리 전체에 해 놓았다. 우연이겠지만 레쥬언 거리의 베트남 통일 40주년을 알리는 대형 장식 “40”은 한국의 포스코가 건설하고 경영하는 호찌민시 최초의 최고급 현대식 백화점인 다이아몬드 플라자와 금호그룹이 야심차게 투자하여 경영하는 3개의 고급 대형 빌딩(금호 아시아나 플라자, 인터콘티넨탈 아시아나 호텔, 인터콘티넨탈 아시아나 레지던스)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40” 숫자가 밤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빛을 발하는데, 양쪽의 다이아몬드 플라자와 금호빌딩이 발하는 빛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60년마다 돌아오는 을미년, 한반도인에겐 참 가슴 아픈 해였다. 1895년 을미년에는 치욕스런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졌다. 1945년 을미년에는 타의에 의한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미, 소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었다. 2015년 을미년, 이전의 치욕과 아픔을 치유할 회복의 한반도를 기대해 본다. 통일의 초석을 놓고 다시 비상하는 자랑스런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응원한다.

이번 글에서는 통일 이후 베트남의 경제 정책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경제 정책 변화 과정 속에서 나타난 1)정치체제의 유연성 2)폭발적 경제 성장 3)남북의 통합 4)재외 베트남인(보트피플)에 대한 적극적 수용 5)세계화 시스템에 접속 등의 긍정적 가치를 동시에 고찰해 보며, 한반도에 주는 통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베트남 통일과 계획경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1976년 4월 25일 통일 후 제1대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국회를 구성하였다. 통일 이후 개최된 첫 총선거와 국회, 이것은 통일 베트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통일 이후 첫 총선에 전 국민의 98.8%가 투표를 했다. 국회를 구성하고 그 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첫 통일 국회가 개최되었고, 국회에서 국가이름, 국기, 국가, 국호, 수도를 결정했다. 이어 그 해 12월 14일부터 20일까지 하노이에서 베트남 공산당 제4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통일 이후 개최된 첫 전당대회이다. 당시 155만 명의 당원 중 대표자 1008명이 참석하여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이때 정부 체제의 통합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경제를 통합해 나갔다. 경제 통합 정책은 한 마디로 ‘사회주의 계획경제 정책으로의 전환과 전국화’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전국에 걸쳐 사회주의 계획경제 정책을 도입, 실시하였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정책의 핵심은 1)토지 및 기업(생산수단)의 국유화 2)집단농장(생산방법의 집단화) 3)배급제 실시(생필품) 4)화폐개혁 등이다. 이러한 실제적인 방법을 통하여 사회주의 체제의 계획경제를 실시해 나갔다. 그러나 계획경제는 시장이 자유롭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다. 주민들은 비협조적이었으며, 생산량은 갈수록 줄었고, 절대빈곤의 상태를 탈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배급표를 받아 매일 아침 일정량의 생필품(쌀, 생선, 고기, 유류 등)을 줄을 서서 받아야 했다.

베트남이나 독일 모두 통일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로 인한 어려움이었고, 독일은 동독을 부양해야 하는 데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베트남은 통일 후 10년간 절대빈곤을 탈피하지 못했고, 독일은 10년 후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분명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발생한다.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빠른 시간 내에 통일이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전환하는 정책을 세워야 한다. 한반도의 상황은 베트남이나 독일과는 다르다. 준비된 통일과 통합은 남북의 경제적 강점을 잘 살려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전망케 한다. 베트남의 통일도 통일의지만큼이나 실제적으로 준비된 통일이 아니었다. 그로 인한 혼란이 있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통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갑작스레 올 수 있다. 철저히 준비된 통일은 혼란을 최소화하고 통일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한반도의 통일은 오히려 G2시대의 본격화와 다극체제의 시대에 그리고 중-일간 갈등 속에 동북아시아 3개국의 균형자 역할을 하며, 국제질서를 새롭게 하고 동북아시아 정세의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 통일 10년, 개혁 개방과 지도자의 역할
호치민시에 한국인이 약 4만 명 정도 밀집해서 사는 푸미흥(Phu My Hung)이라는 신도시가 있다. 베트남의 ‘분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푸미흥 지역 안에 교육과학기술부 소속의 재외한국학교 중 최대 규모(1399명, 2014년 4월 1일 학교 홈페이지 공식 통계)의 한국국제학교가 있고, 각종 국제학교가 5개 정도 있다. 이 푸미흥 신도시를 관통하는 대로 이름이 응우옌 반 린(Nguyễn Văn Linh )이다. 베트남의 길 이름은 영웅의 이름을 빌려서 짓는데, 왜 베트남 최대 신도시, 외국인 최대 밀집지역, 베트남의 세계화, 현대화, 도시화의 상징인 푸미흥 대로의 이름을 응우옌 반 린으로 지었을까?

베트남의 정치, 경제와 베트남의 개혁개방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은 주로 도 므어이(Đỗ Mười)만을 알고 인용한다. 아마 그가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베트남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을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개혁개방의 정착기에 들어서며 그 효과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베트남이 사회주의 계획경제 정책에서 개혁개방으로 급전환하게 한 결정적 인물은 응우옌 반 린(Nguyễn Văn Linh, 1915-1998)이다. 응우옌 반 린은 1986년에서 1991년까지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다. 그는 개혁개방의 길을 연 사람이고 베트남 경제가 개혁개방으로 들어서도록 최대의 공헌을 한 사람이다. 현대사에 있어서 베트남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민족을 위한 지도자는 통일 전에는 호치민이고 통일 후에는 응우옌 반 린이라고 할 수 있다.

응우옌 반 린과 관련된 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1983년 7월 12일부터 19일까지 당시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인 레 쥬언(Lê Duẩn, 1907–1986)은 구소련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 기간 베트남 최고 3인 지도자인 쯔엉 찐(국가평의회 의장), 팜 반 동(수상)과 보 찌 꽁(농업부 장관)은 베트남의 고산도시 달랏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응우엔 반 린(당시 호찌민시 집행위원회 서기장)은 생산 경영 책임자들과 3인 지도자들과의 직접 회동을 12일부터 16일까지 주선했다. 회동의 목적은 생산 목표와 현 생산 경영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계획경제 정책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의욕이 생기지 않고, 생산량을 목표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동이 끝나고 17일에는 응우옌 반 린이 제안하여 3인 지도자가 각 생산현장을 시찰하도록 했다. 생산 현장을 시찰한 후, 19일에는 응우옌 반 린이 3인 지도자와 개인적은 만남을 가졌다. 그 만남에서 응우옌 반 린은 계획경제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모두 털어 놓았다. 3인 지도자는 응우옌 반 린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며, 한 주간의 “달랏 회담”에서 논의되었던 모든 사상적 내용을 응우옌 반 린이 문건으로 정리하여 베트남 공산당 제6차 전당대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이것이 베트남 개혁개방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응우옌 반 린은 1986년부터 베트남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을 맡아 개혁개방을 주도했다. 그리고 응우옌 반 린에 이어 도 므어이(Đỗ Mười)가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을 맡으면서 더욱 개혁개방의 속도를 낸 것이다. 통일 이후 점진적 통합을 이루어 가며, 개혁개방을 통한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요인이 지도자의 유연성과 결단이었다.

인민의 행복을 위해 개혁개방을 외친 베트남의 응우옌 반 린. 호치민시에서 기업가들을 데리고 1500m 고산지대 달랏으로 올라간 응우옌 반 린.

베트남이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호치민이 있었지만, 통일 이후 통합 과정에서 특별히 남쪽의 상황을 솔직히 털어 놓으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응우옌 반 린이 있었기에 지금의 베트남이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개혁개방은 남북 통합을 자연스레 이끌었으며, 보트피플로 해외로 탈출하여 성공한 교포들의 자금은 고국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세계화 시스템에 접속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를 차용하여 베트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베트남의 공산당, 베트남인의 민족주의와 현실주의는 민족의 번영, 국가의 발전이라는 현실 앞에서 언제든지 사상적 측면을 보류할 수 있는 듯하다.
응우옌 반 린 대로는 약 10㎞의 왕복 10차선이다. 이 도로는 베트남 신도시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도로이자 남부 베트남의 중요한 산업도로이다. 이 도로는 신도시 주변의 공단과 사이공 항구를 연결한다. 응우옌 반 린 대로는 베트남 통일 이후 개혁개방을 표방하며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베트남 경제의 상징이다. 이 도로는 동북쪽(하노이)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연결되고, 서남쪽(메콩델타)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와 연결되며 세계로 향하는 롱탄 신 국제공항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될 것이다. 응우옌 반 린 대로를 보며 통일코리아 이후 뻗어나갈 대로를 상상해 본다. 북쪽으로, 만주벌판을 거쳐 유라시아로 뻗어나갈 통일코리아의 대로.

통일의 경제 효과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결정하였다. 응우옌 반 린이 서기장으로 있던 1986-1990년은 개혁개방의 시작기라고 할 수 있다. 통일 이후 10년 동안 계획경제를 시행하다 보니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1990년 동안 평균 3.9%의 GDP가 성장했다. 베트남 경제의 결정적 변화는 1988년부터 시행된 농부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농경지의 사유화”였다. 이 결과 1988년에 45만 톤의 쌀을 수입하던 베트남이 1989년에는 100만 톤의 쌀을 수출했고, 1990년에는 150만 톤을 수출함으로 세계 쌀 수출국 3위에 오르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1986년에는 774.7%이던 것이 1990년에는 67.4%로 내려왔고, 2007년에는 12.6%가 되었다. 경제를 “정부가 결정하던 것에서 시장이 결정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베트남식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들어서며 더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게 된다.

2011년 세계 경제가 어려운 중에도 6%대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고, 해외 교포들의 송금액은 꾸준히 증가해 개혁개방 전에는 거의 없던 것이 1995년에는 3억 달러가 되었고, 2011년에는 90억 달러에 이르렀다. 1인당 GDP가 1300 달러가 되었고, 구매력 GDP는 3900 달러에 이르렀다. 국내총생산은 1210억 달러를 달성했다.

2014년 12월 28일자 베트남 최대 일간지 뚜오이 쩨 신문 3면 머리기사에서 호치민시 인민위원장은 호찌민시의 GDP가 연초 목표보다 초과 달성한 9.6% 성장하였으며, 호치민시 1인당 연 평균 수입이 2013년의 4545불보다 12.89% 인상된 5131 달러라고 발표했다.

세계화의 시스템에도 적극적으로 접속해서 1992년에 EU와 무역협정을 맺고, 1995년에 아세안의 회권국이 되었으며, 2002년에 WTO 가입 협상을 시작하여 2007년 1월에 정식 가입했다. 그리고 2014년에 한국과도 FTA를 체결했다.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이 종전 후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으로서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미국과 베트남의 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종전 후 취해졌던 경제조치가 해제되면서 북미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개혁개방은 남북이 더욱 통합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고, 해외교포들과 통합하는 기회가 되었다. 더 나아가 세계와 소통하게 되었다.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중국이 급성장하며,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새롭게 성장동력을 얻는 길은 통일이다. 통일은 한국경제가 지속가능한 성장동력을 얻도록 할 것이다. 통일은 중-일 사이에서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통일이 없는 한반도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한반도 통일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다시 비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윤한열/ 호치민국립인문사회과학대학교 강사

윤한열  yhyl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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