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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계간 [통일코리아] 2014년 겨울호
“지금 통일은 과거 독립운동보다 더 큰 희생과 양보 필요”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인터뷰

2015년 해방과 분단 70년을 앞둔 2014년 12월 23일 남북관계는 여전히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숙명여대 명예교수이신 이만열 장로님 자택을 찾았다. 질풍노도 같았던 현대한국사를 몸소 경험하신 역사학자로서 민족통일은 일생의 과업이었을 것이란 예측과 함께였다. 이 교수님은 보수적인 신학하에 독실한 신앙생활을 해오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 1990년대부터 미국에서 개최된 남북기독학자회의에 참여하셨고 대북지원 단체인 남북나눔운동과 탈북민교육기관인 여명학교를 지원해오셨다. 현재는 외국인 근로자 선교기관인 희년선교회를 책임지고 계시면서 의료, 인권, 다문화가정 등 이 땅에 나그네로 온 이(근로자)들을 위한 선교기관을 돕는다. 제8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셨던 이 교수님께 70년 동안의 민족분단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역사적 교훈을 주는지 먼저 들어 보았다.

   
▲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서울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최승대 기자

-다사다난했던 2014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새해에는 해방과 분단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지 꼭 70년이 됩니다. 지난 70년간의 남북분단 시절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아픔과 시련을 주었고 그것은 과연 장래의 소망을 품게 하는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해방과 더불어 타의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습니다. 분단은 타의에 의해 이뤄졌지만 분단된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일은 우리의 자의적으로 이룩했습니다. 물론 우리 선배들 가운데에는 여운형, 김구, 김규식 선생 등 중간에 서서 노력한 분들도 없진 않지만, 당시 상황이 국제적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밖에서 끌어내는 힘, 원심력(미국과 소련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요)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해방된 이후 우리 역량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문제를 냉전체제에 그냥 맡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70년 동안 분단된 채로 있는 것입니다. 물론 북한이 남침을 해 와서 오늘날까지 분단과 적대의식을 더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통일전쟁’이라고 그럴 듯하게 명분을 내세웠지만 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해야 하는 것이지,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하나로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도 않고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더 큰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이 극단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북도 남을 포함해서 미국에 대한 증오를 극대화시켜 그것을 그들의 생존의 방식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상처가 아물어지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남북관계를 돌아보면 1970년대 들어 처음 7·4 남북공동선언을 하게 되는데 그 또한 미국이 중공과 데탕트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우리 자의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데탕트 분위기하에서는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자기 체제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되었지요. 그래서 남북은 정권의 정당화 내지는 공고화를 위한 수단으로 남북대화를 사용했습니다. 가령 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에, 남쪽에서는 10월 유신이라는 것을 통해서 독재화의 길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고, 북쪽은 북쪽대로 소위 사회주의헌법을 통해 김일성유일체제를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남북정권은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남북관계를 변화시킬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재정권의 정당화를 추구한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모든 통일논의가 남북한 정권의 수뇌부가 관장해 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가 1980년대 초부터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면서부터는 통일문제, 민족문제, 남북문제 등이 통일의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려야 할 민중들 중심으로, 민중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죠. 남쪽에서만 이루어진 문제제기여서 한계가 있었지만, 기독교계의 이런 노력을 통해서 종래 정권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통일논의 혹은 민족문제가 민중 차원에서도 논의가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곧 바로 통일운동의 지평과 지형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요.

80년대를 거치면서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어 남북이 민간 접촉을 좀 했잖아요? 또 90년대에 와서는 북한이 어려워지니 기독교계가 북한돕기 운동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지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에는 접촉도 많이 하고 6·15 공동선언이라든지 10·4 남북공동성명 등 통일의 길로 많이 접근했었죠. 그러나 보수라고도도 할 수 없는 수구(守舊)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파탄나고 오히려 전보다 더 적대적인 관계로 되어 버렸습니다. 보수[정권이]라면 보수의 가치를 일정하게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같은 사람은 군대도 안 다녀온, 국방의 의무도 제대로 안한 사람입니다. 영국 왕실이나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은 솔선해서 군대부터 다녀오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최소한의 보수의 참된 모습이지 기득권 지키는 데에만 연연한다면 수구라고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남북관계와 통일문제가 엉망이 되었지만, 그러나 제 페이스북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또 기회를 주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그 말씀은 지난 70년간의 우리 민족 분단을 평가하시는 교수님의 평가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그런 말을 더러 하지요. 명시적으로 염두에 두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인간이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한계를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저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 이만열 명예교수 ⓒ최승대 기자

-그렇다면 지난 70년간 우리 민족에겐 분단으로 인한 고통이 아직도 충분하지 못한 건가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철저히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어려웠던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데도 저쪽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고 해왔다면 그런 면에서는 철저히 우리가 우리 한계를 깨달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신앙고백적인 의미로 한 말이지만 남북정권이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자, 우리 인간의 꼼수로 통일은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겠구나,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보편적인 진리와 사랑의 질서 위에서 통일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라고 되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한의 정권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거나 흡수통일론자들처럼 우리식으로 일방적인 통일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점도 바로 우리 힘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 역시 자기 한계를 아직까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서 나온 오만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북한붕괴론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요.

-지난 12월 모처에서 교수님께서는 철들면서부터 통일을 위해 기도해오셨지만 후대에 통일시대를 넘겨주시지 못할 것 같다고 한탄조의 전망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숱한 사회적 전변사태를 겪어오셨는데 오늘날 통일환경은 어떤 면에서 가능성이 있고 또 어떤 면에서 암울하다고 보시는지요?

저는 한반도 남단에서 나고 자랐지만 왜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짧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25가 일어나서 공산군이 우리 마을까지 내려왔는데 우리는 피난을 못 갔습니다. 낮에는 미군이 폭격을 해대는 최전방에 살았습니다. 북한군이 진주(晉州)는 점령했고, 마산(馬山)까지는 못 쳐들어간 상태였는데 우리가 진주와 마산 사이에 위치했으니까 인민군하고 같이 한동안 지내게 되었죠. 인민군을 우리가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전쟁 통에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전쟁 전에 당시 낙동강에 많이 번식하던 디스토마에 걸리셨습니다. 이 병은 약을 쓰면 억제가 되기 때문에 수명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변 전에는 약을 쓰니 별로 문제가 없었지만 전쟁이 나서 약을 쓸 수 없게 되자 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반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또 우리 막내 자형 되는 분은 납치를 당했습니다. 진주사범학교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시다가 납치되셨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누님은 혼자 40년 수절하다 2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또 우리 종형 가운데 세 분 정도가 전쟁으로 돌아가셨고 그러다 보니 6·25의 참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죠.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민족분단이 가정생활과 개인에까지 미친 깊은 상처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대학에 들어가 역사공부를 하면서, 시대마다 당면하는 민족사적 문제가 있다고 보았는데, 우리 시대의 과제는 무엇이냐 했을 때 남북분단을 해소하는 것, 즉 ‘통일이다’라는 자각을 더 깊이 갖게 되었지요. 저는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통일에 대해 기도해 왔고 요즘도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는 내가 죽기 전에 그런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믿어 왔었는데, 요즘 와서 제가 나이가 많아지니까 생전에 통일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못난 세대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그 무거운 짐을 후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면 자다가도 가끔 뻘떡 일어나곤 한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통일의 길은 없을까 하고 모색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지금처럼 너무 벌어져 있고 적대시하는 상황이라면 통일은 점점 더 요원해지지 않겠습니까? 일반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사이가 나쁠수록 접촉하고 계속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치고받더라도 일단 만나면서 대화를 해야 해결점이 나오는데 이명박 정권 이후로는 접촉조차 금하고 있단 말이지요. 과거 냉전시대에는 구심력 없는 상태에서 원심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남북이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주변국들이 얼마든지 이해하고 때로는 지원도 해줄 수 있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거든요. 우리가 주도적으로 북한을 향해 만나자, 가까이에서 서로 대화를 해보자 하면 미국이나 다른 주변국들이 예전처럼 제재를 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명분이 상당히 없어진 것이지요. 저는 이런 상황에서 남북이 서로 접촉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통일을 위해서 여러 가지 여건 조성을 해야 하는데 국제적으로는 중립화 문제를 심각하게 점검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대륙으로부터 또 때로는 해양으로부터 올라가는 교착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해양세력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과 그 뒤에 있는 미국과 영국, 또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대륙세력, 이들이 전부 자본주의체제가 된다든지 사회주의 체제가 된다든지 한다면 서로 대결하지 않고 가까이 지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역사적으로 대륙․해양 양대 세력이 항상 대결해왔기 때문에 양대 세력이 교착되고 있는 지점에 위치한 우리나라도, 통일을 어느 한 쪽에만 밀착시키지 않고 하자면 여간한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북이 구심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주변국 이해관계나 양대 세력에 반하지 않아야만 우리의 통일에 대한 그들의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적 동의를 얻지 않고서는 한국의 통일이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을 이룩하자면, 중립화방안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민족끼리는 통일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때 저는 이익의 공유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생각합니다. 남북이 몇 년 전만 해도, 박근혜 정권 들어서서 그랬지요. 개성공단을 몇 달간 닫았었잖아요? 문을 닫았어도 결국 합의를 해서 다시 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익의 합치점이 있었기 때문이죠. 남북이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통일도 일차적으로 그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이 좋은 사례이지요. 저는 개성공단 같은 경제특구를 10개, 100개만 만들 수 있으면 통일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역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민주화와 인권, 자유와 창의성이 없는 사회는 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만큼 이런 전제가 통일한국의 토대가 된다면, 과거 김대중 정권 때에 남북이 합의했던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것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립화란 냉전시대 미-소 관계나 혹은 오늘 날 미-중 관계에서의 중립화를 뜻하는 것인가요?

중립화는 넓게 봐서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해양세력을 대표하는 것이 현재로는 미-일이지만 옛날 같으면 영국이었지요. 영미일 이렇게 되는 것이고 대륙세력은 중소가 되는 것이지요. 중립화는 1880년대부터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당시에 우리나라와 외국이 개방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1876년 한국과 일본이 조약을 맺고 1882년 미국과 그 뒤 영국 등과 맺을 때, 그때 우리나라에 왔던 외교관들에 의해 거론되던 내용입니다. 1884년에 거문도 사건이 일어났죠. 영국이 러시아, 즉 남진하려는 대륙 세력을 막고자 해서 발생한 것이죠. 그런 모습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한반도의 중립화를 내세운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거론된 것은 6·25전쟁 후 제네바협정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미국도 손을 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오게 되었지요. 미국 맨스필드 의원과 장군들 가운데서도 한반도의 통일이라면 중립화밖에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중립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중립화가 되면 설득력도 능하고 응집력이 강한 공산주의자들이 중립화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공산화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중립화를 주장하는 한국인들은 해외에 있거나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1953년 휴전이 되는 가운데 다시 제기되었습니다만 그때에 이론적으로 활발히 검토되지 못했습니다. 외부 인사들에 의해 이야기가 되면서 국내에서는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던 김삼규 같은 분이 주장했지요.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는 방법은 중립화밖에 없다고 봤었는데 당시 그 분도 국내에서 끝까지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일본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 이만열 명예교수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대한민국의 현실에 짙은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승대 기자

-지난 한 해 동안 색깔론과 더불어 지속적인 종북이슈가 쏟아졌었는데 그러한 정치 환경이 남북관계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국내정치문제와 남북관계가 끊임없이 연동하며 통일문제의 정치화 현상이 반복되는 점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통일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은 불가피한 문제입니다. 단지 민족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데, 통일문제와 관련된 것을 이슈화시키거나 북한 위협을 과장시켜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그것으로 표를 모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컨대 정치적 경쟁자를 종북세력으로 낙인찍는 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난번 대선 때에 불거졌던 NLL 문제 등도 그런 사례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전혀 말하지 않았는데도 NLL을 포기했다는 식으로 선거전에 이용,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수구적 발상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몇 세대가 지나도 타당성이 검증되는 그런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찰나적 이익을 위해 정쟁의 도구로서 통일 관련 문제를 제기하고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문제는 오늘 당대의 문제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텐데 역사와 시대를 걸고 다 동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통일문제를 얘기할 때 표 한 표 두 표에, 또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야말로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후손들에게도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즘은 통일문제, 민족문제를 너무 정쟁의 도구로 삼아 우리 안에서 이념적 갈등을 계속 유발시킴으로 그것으로 보수, 수구집단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수구집단이 뭉치면 뭉칠수록 배제되는 그룹이 나오기 마련이고 이것이 민족갈등을 일으키는 단계로까지 가고 있는데 이는 매우 한심스런 일입니다. 이러한 사태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정치화는 시키되 정쟁화는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통일은 정치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통일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정쟁의 도구로 쓰이면서 이념적 프레임을 통한 낙인찍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런데 거듭해서 통일문제가 정쟁의 도구로 쓰이는 데도 국민들이 이에 쉽게 동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과 공의의 문제보다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움직임들은 예의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안보문제를 정쟁화시키면 더 건전한 통일방안이나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차단되고 국민들이 통일논의로부터 아예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즉, 정권이 추구하는 방향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이것을 소외, 배제시킬 뿐만 아니라 이를 곧바로 북쪽과 연결시켜버리는 것이지요. 이효리씨 인터뷰 기사를 보았는데 이런 말을 했더군요. “우리의 일상에 관한 일들, 공동체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왜 좌파라고 하냐?”며 본인이 어느새 ‘좌효리’가 되어 있다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는 말들이 있는데 ‘친일파’와 ‘빨갱이’입니다. 요즘은 빨갱이를 종북세력이라고도 말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말을 삼가하고 자기검열을 하게 되지요. 이걸 목표로 ‘종북’ ‘종북’을 입에 거품을 튀기며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통일문제를 민중의 것으로 내려놓았으면 민중 가운데에서 통일방안이 모색되고 검토되도록 해야 하는데, 과거 냉전시대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이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면 ‘좌빨’이니 ‘종북’이니 하며 적대시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갈수록 힘겨워지는 민생문제는 민족분단의 왜곡된 현실과 무관하지 않고 오히려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 등 주변 강국들의 경쟁구도는 남북관계를 넘어서서 한민족의 장래를 규정하는 또 다른 변수입니다. 과거 한민족의 역사에 비출 때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요?

태평성대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당시에는 모르지만 지나 놓고 보니 그 시절이 태평성대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더러 있겠지요. 남북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남북이 왕래할 수 있고 이익을 서로 공유하면서도 이것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정권이나 민족 전체가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북한을 볼 때 역지사지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북한은 더 할 것입니다. 저쪽에서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니까요. 우리 입장에서 먼저 찬찬히 따져 보면 북한이 왜 저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지 역지사지가 가능합니다. 저는 요 최근에 와서 국제관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우리가 북한 입장이라도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겠다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유엔에서 미국이 주도하여 북한에 대해 벌써 몇 년간 인권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업자득이지만, 핵과 미사일 문제로 국제적 제재를 받고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불이익이 대단히 많지요. 교역이나 금융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북한의 대표적 무역회사들 거래가 단절되고 또 국제사회 원조를 받으려 해도 쉽지가 않은 겁니다. 이런 상황이니까 현상을 동결한 채 북에 대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 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더구나 남북 국력을 비교하면 국방예산만 해도 우리가 30배가 넘는데 북한에 대해 여전히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곧이 들리는 이야기일까요? 군부에서 하는 얘기로는 맞싸움하면 우리가 진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북한의 위협을 과장해서 백성을 옭아매려는 수단으로밖에 보이질 않아요. 북한도 우리를 무력으로 침략한 것 때문에 세계로부터 불신과 제재를 받아 왔는데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니 자신들의 노력도 더 많이 필요한 것이지요.

-교수님께서는 1990년대 탈냉전시대로 접어들던 초창기부터 해외에서 남북기독학자회의에 참여하셨고 남북나눔운동에도 깊이 관여해오셨습니다. 통일을 진정으로 추구한다면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 북한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으신 교훈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북한 사람들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91년 남북기독학자회의에 참여하면서부터였는데 뉴욕의 스토니포인트라는 곳에서였습니다. 남쪽에서 여섯 사람, 북쪽에서 여덟 사람이 참석했었지요. 북쪽의 대표적인 사람이 그 직전에 유엔대사를 6년간 역임한 한시해로서 아주 달변에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박승덕 주체사상연구소장은 황장엽의 직계 제자로 이론이 밝고 강연에서도 하나 흐트러진 말이 없이 아주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메모지 하나 들고 30분간 강연했는데 그대로 적으면 토씨 하나 틀림없이 좋은 문장이 될 정도로 인상 깊은 강연을 했습니다. 그 다음 고기준이라고 기독교도연맹서기장이 있었습니다. 김구식이라는 교수도 한 사람 있었는데, 이 분은 6·25 전에 서울대 상대 학생이었는데 의용군 모집 할 때 들어가서 북으로 갔다고 그래요. 노철수라는 분은 일행의 감시관으로 나오지 않나 싶었어요. 이성봉 목사, 최옥희 전도사, 그리고 통역으로 김혜숙씨가 왔었습니다. 이분들과 대화를 해보니 대화가 제법 통했습니다.
한시해는 유엔 대사로 뉴욕에 오래 있었던 사람인데 그 양반하고 조용히 독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독학자회(북미)가 총회를 하는 시간인데, 저는 거기에 특별히 들어갈 필요가 없어서 식당에 커피 마시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된 겁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소 1001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갔고, 금강산도 연다고 하는 때였는데 그런 일들에 관해서 물어요. 금강산 관광이 될 것 같은지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또 199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중 누가 될 것 같은지도 묻더군요. 그는 자기들이 원하는 어느 분이 될 가능성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당시의 국민 정서를 가지고 말했죠. 또 학생들 데모하는 게 신문에도 많이 나오고 하니 북쪽에서 볼 때 나라가 금방 어떻게 될 것같이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묻기에 당신들이 그런 기사에 무슨 기대를 하는 것 같은데 어리석은 기대라고 말했지요. “우리 사회는 학생들의 시위가 하나의 문화다, 우리 학교만 해도 대략 1만 여명이 넘는데 교내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은 기껏 30여명 가량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지요.

저는 김정일에 대해 우리의 당시 정서를 가지고 묻고 그 쪽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는 무엇보다 남쪽에서 김정일에 대해 아주 잘못 알고 있다고 했어요. 그는 남쪽의 김정일 인식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해요. 김정일은 현지지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쪽에서는 현지지도가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방식이라고 설명해요. 남쪽은 법을 통해서 하지만 자기네는 인민들과의 합의가 중요한데, 그런 합의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현장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통해 한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4일은 지방으로 다니고 3일은 평양에 있다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이지요. 그때 저는 한시해를 두고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북한을 방문하고 오는 길이었던, 미국 북장로회 동아시아담당 선교부 총무였던 이승만 박사를 만났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은퇴 후에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박사는 제가 해직교수 시절 미국에 갔을 때 연분을 맺었던 분이지요. 이분과 한시해, 최옥희, 그리고 뉴욕 교민들 여남은 명과 함께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북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처음이라 긴장이 잔뜩 되었는데 한시해는 아마도 전략상 그랬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남쪽의 운동가요를 거의 알고 부르더군요. 놀랐습니다. 또한 이성봉 목사 같은 이는, 박승덕 씨가 강의시간에 주체사상과 기독교가 조화 가능한 것으로 강연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요. 그 이유는 주체사상은 무신론이고 기독교는 유신론인데 어떻게 조화가 가능하냐는 겁니다.[이만열, <이만열 교수의 민족․통일 여행일기> 지식산업사, 2006 참조] 그런 걸 보면서 북한도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구나, 다만 제대로 표현을 못하고 있는 사회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양에 다섯 번, 개성에 한 번 다녀왔는데 그 중에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북에 가서도 지적을 많이 한 셈입니다. 제 경험으로 봐서 북에 가서 비판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자꾸 만나야 되지요. 가서 보면 체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사람들과 내밀하게 얘기할 때는 속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양면성을 이해하면서 북한 사람들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이야기를 극대화시켜 가는 것, 그것이 남북관계에서 민간이 끌어내야 하는 점입니다. 곧장 공식적인 얘기만 떠들고 말면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고 내밀한 속 얘기를 끌어내는 데까지 나가는 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의 통일준비라고 봅니다. 북한의 여러 계층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진솔한 얘기도 나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북한 사람들의 속 얘기를 끌어내는 기회를 계속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북한에 대해 대결주의적 태도를 보여 왔고 사회적으로는 반공의 보루로 여겨졌습니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반공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었지만 인권과 민주화를 주장하면서부터 입장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권을 위해서 민주화가 필요하고 궁극적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통일이 필요하다는 순차적인 의식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북한의 처참한 생활상과 인권문제로 이에 대한 교계의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통일지상주의와 편협한 반공주의를 극복하고 통일코리아를 이룰 수 있는 개신교 윤리는 무엇일까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많이 못 가졌습니다. 7·4공동선언이 나왔을 적에도 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일 것이라고 의구심을 가졌는데 적중했지요. 당시 교회들 중 사회적 책임을 느꼈던 교회들은 인권, 민주화운동에 열심이었죠.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안보(安保)지상주의자들로부터 반격을 받았는데 특히 신군부로부터 그랬죠. 북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상황인데 남쪽에서 인권, 민주화를 요구하며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식으로 통제를 가했지요. 이것은 당시로서는 넘기 어려운 벽이었습니다. 그때 교회 안에서 이 문제를 놓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인권과 민주화를 주장하는데 왜 번번이 안보문제로 벽에 부딪히게 되는가? 그러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민주화 주장이 문제가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만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은 분단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안보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결국 분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분단을 해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통일운동이지요. 그래서 1980년대 들어 기독교계의 인권 민주화운동은 곧 통일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처음에 얘기한대로 한국의 통일운동사에서 보면, 그 전에 정권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었던 통일논의를 민중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었지요. 이게 1980년대 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1990년대에 와서 북한을 돕는 데에도 한국교회는 진보·보수가 손을 잡고 많은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게 있습니다. 1968년 박정희의 3선 개헌 때 한국기독교가 진보와 보수로 확연하게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1993년 북한을 돕기 위해 진보와 보수가 손을 잡고 만든 것이 남북나눔운동입니다. 이것은 국내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양 진영으로 나뉘어졌던 교회가 북한을 돕자는 민족문제를 놓고서 손을 잡았던 것입니다. 이는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남북나눔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왔습니다. 그후 남북나눔운동은 열심히 대북지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위원회를 두어 연구 활동에도 매진했습니다. 이 연구위원회가 2000년도 중반에 와서 ‘한반도평화연구원’(KPI)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2000년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들어와서, 나름대로 민관(民官)의 힘을 모아, 민족적 통일의지를 묶어 6·15와 10·4선언을 하게 됩니다. 한편 2000년대에 들어서서 북한이 보인 핵실험과 미사일 문제에 촉발되어, 그동안 내연(內燃)되고 있던 교회 내 보수·수구세력들이 자기 소리를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교회가 오히려 반통일 세력의 아성처럼 변해 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서게 된 데에는 역사적 연원이 있습니다. 북한 급진적 토지개혁을 경험한 기독교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집단을 구성하는 데에 주역이 되었지요. 6·25전부터 서북청년단은 행세가 대단했습니다. 제가 있던 시골에까지 총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경찰들도 벌벌 떨 정도였으니까요. 북에서 핍박받던 기독교인들도 내려와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최근 서북청년단 재건활동에서 보면 이들 세력이 다시 결집하다시피 하는 모습인데 이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부모 형제를 총칼에 빼앗기고 뿐만 아니라 토지와 가옥들까지 다 빼앗기고 내려왔으니까요.

그러나 교회가 이념적으로 반공사상의 보루처럼 되어가고 ‘종북세력’을 발본색원하는 진영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교회가 원수 갚는 데에 앞장서는 중심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임동원 전 장관은 본인이 통일운동에 나서게 된 이유를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보고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남북화해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교회는 자신이 비록 쓰라린 고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지는 태도로 나갔어야 합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기 남북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자, 당시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수구세력들이 다시 결집하고 목소리를 표출할 때에 앞장섰던 교회들은 통일시대사에서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 두려움마저 듭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반 통일을 외치며 대북강경세력의 보루처럼 변화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게 역사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교회가 세속화․상업화․자본화하는 과정과 맥을 같이하고 있으니 이 또한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라고 외치면서 성전 청소에 나섰던 예수님의 분노에 상응하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는 십자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도를 따라야 합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도를 내세우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유연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과거 한때 교회가 반공사상의 보루가 되었던 것은 역사적 맥락을 통해 볼 때 이해할 만하고 그것으로 일정하게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냉전이 다 끝났는데도 기독교회가 대북 적대시 정책의 보루가 되고 반 통일운동에 나서는 듯한 모습은, 과거 민족사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기독교사에 비춰 보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민주주의를 실천하시는 과정에서 해직의 경험도 있으셨고 지금도 여전히 크고 작은 사회적 실천에 앞장서고 계십니다. 돌이켜 보시면 보람된 일도 있고 후회되는 일도 있을 줄 압니다. 후배 세대에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과 더불어 특히 통일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통일코리아> 독자들을 비롯한 시민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해직된 것이 꼭 민주화운동 때문은 아닙니다. 며칠 동안 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나올 적에 나를 좀 안다는 경찰관이 “선생님, 이것은 유탄을 맞은 겁니다”라고 해요. 길가다가 엉뚱한 곳에서 돌이 날아와 머리에 맞은 꼴이란 거요. 그 말은 내가 특별히 민주화운동을 해서 해직된 것이 아니다 하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70년대 중반에 KBS에서 한국사강좌를 서너 달 한 적이 있는데 인기가 좋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강좌 소식을 들었는지 녹화필름을 가져오라 한 모양입디다. 당시 녹화필름도 변변치 않았던 터라 재생해서 쓰느라 녹화본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30여회나 되는 강좌를 다시 녹화해달라기에 누군지 직접 가서 강의하겠다고 하니 그럴 수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다시 강의를 해주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알게 된 경찰관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평생 그렇게 생각해왔듯이 오늘날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하는 말인데 모든 학문이 결국 통일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모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우리가 제대로 행하지 않고 간다면 그 역사적 질곡을 후손들에게 넘기면서 우리는 부끄러운 세대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통일문제를 놓고 지금까지 고민 해온 여러 성과들 위에, 크리스천들은 기도하면서 학문하는 사람이면 자기 학문을 통일문제와 연관시키고 기업이나 다른 일들을 해온 분들 역시 통일운동과 관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가끔씩 교회특강 같은 데 나가서 받는 질문이 있는데 그러면 통일을 위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작은 힘이라도 모으자, 시간을 내고 물질을 투자해서 당장 필요한 일들을 해 나가자고 답합니다. 그건 통일동아리를 만들어 회원이 되고 통일운동을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회원으로 물질과 시간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관심이 없는 것이다.

   
▲ 이만열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한 윤은주 박사(왼쪽) ⓒ최승대 기자

또 이론적으로도 어떤 통일을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더욱 주밀하게 검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중립화방안이라든지 혹은 다른 남북통일방안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통일을 주시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학문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 말만 무성했습니다. 일례로 통일세 얘기를 하면 금세 부정적이 되고 맙니다. 통일을 위해서 내 지갑은 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정신으로는 통일을 주어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통일은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옛날 독립운동을 했던 그 어른들보다 더 큰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골드만삭스 보고서에서도 2050년이 되면 코리아가 경제력으로 세계 2위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조건은 통일이 되었을 경우에 가능하다는 겁니다. 2,400만 인구를 갖고 있는 북한은 우리와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이니 동남아의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협력이 가능합니다. 북한에 매장된 지하자원을 여기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말이 되겠지요. 이 시점에서 분단으로 인해 낭비되는 인적 자원과 또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물적 자원들을 감안하면 누군가 말했듯이 “통일은 대박 그 이상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선 발상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군사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에 새로운 변화를 제공할 수 있다면, 통일비용이라는 것을 마치 낭비처럼 우려하던 것이 얼마나 큰 기우였던가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면, 우리가 먼저 평화통일의 기치를 내세우며 민족통일의 장단기 과제를 수립,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통일의 방법이 무엇인가? 거듭 말하지만 남북 공통의 이익을 창출하고 확장해나가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이해관계의 동물이니까, 통일에 있어서도 그걸 적극 활용하여 인센티브적인 부가가치를 평화적으로 증가시켜 갈 때 통일의 길이 암중모색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지난해는 갑오년, 말(馬)의 해여서 그랬는지 뛰고 헉헉거리며 험상궂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양의 해이니 만큼 평화롭고, 온순하고, 또 모두가 먼저 양보하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통일코리아> 독자들께서도 올 한해 통일을 위해서 작은 실천이라도 꾸준히 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진행 및 정리: 윤은주/ (사)뉴코리아 대표, 북한학 박사

참고도서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2000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이만열교수의 민족․통일 여행일기』, 지식산업사, 2005
공저,『민족통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 도서출판 두란노, 1995
『북한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화해와 평화의 좁은 길』, 홍성사, 2013

윤은주  ejwarrio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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