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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계간 [통일코리아] 2014년 겨울호
[소설] 황금의 도시

발소리와 숨소리를 죽이며 지내는 동안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과 겨울이 오고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고향을 떠난 것이 삼 년 전이다. 그저께로 육 개월 동안의 보호기간이 끝났고 김 형사는 이틀째 연락이 없었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김 형사는 직장을 알선하겠다거나 쇼핑, 저녁식사를 이유로 거의 매일 나를 찾아왔다. 찾아오지 못하는 날엔 하루에 서너 차례씩 전화를 냈다. 그는 나를 동생처럼 여긴다고 말했으며 자신을 형님처럼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대구에 정착한 이래 여섯 달 동안 나는 혼자 집밖으로 나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소소한 물건을 사는 일도 김 형사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서곤 했다. 언제나 휴대폰을 곁에 두고 그의 연락에 지체없이 응답했고 화장실을 갈 때나 세수를 할 때도 휴대폰을 꼭 챙겼다. 조금이라도 전화를 늦게 받으면 그는 꼬치꼬치 캐물었고 자질구레한 일까지 설명을 요구했다. 그 설명이 귀찮아 나는 아예 집안에만 틀어박혔다.

수상쩍어 하는 듯했던 김 형사의 시선은 내가 집에 틀어만 박혀 지내는 동안 염려로 바뀌었다. 김 형사는 무엇이든 일을 해야 한다며 내 손을 끌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공장들은 이 도시에 흔해빠진 염색공장, 섬유공장들이었다. 서너 차례 그를 따라 공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나는 좀 더 생각을 해본 뒤에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는 말로 물러섰다. 그는 정말 내가 그따위 한심한 일을 하자고 목숨을 걸고 남조선에 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처럼 나를 염려했던 김 형사는 집중 보호기간이 만료됐음을 알리는 저녁식사를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어쩌면 김 형사는 나를 염려했다기보다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여섯 달이 지나가기를 학수고대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지난 여섯 달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던 같다.

이제 아버지의 옛집을 찾는 일만 남았다. 따르르했던 옛 영화를 찾아내기만 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의 고생도, 목숨을 걸고 건넜던 국경의 차가운 강물도, 국수 한 그릇에 몸뚱아리를 내놓아야 하는 여동생 정녀의 서글픈 밤도 끝이 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 도쿄제대에 다녔던 사람으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한때 김일성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을 만큼 투철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낡은 이론은 더 이상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변종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북조선식 공산주의와 어울리지 않았다. 당뿐만 아니라 아버지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대학과 당의 선전부에서 쫓겨난 이후 제때 생활비를 벌어오거나 배급표를 받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일자리를 잃은 보통 북조선의 남편들처럼 ‘술 내놔라’ ‘밥 내 놔라’ 하며 아내를 타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휑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거나 매사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타박이었다.

아버지는 남조선의 경상도 출신이다. 월북을 결심한 것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직후라고 했다. 고향마을 앞까지 밀고 왔던 해방군은 미군이 인천 앞바다에 상륙 이후 퇴각을 거듭했다. 미군의 인천 상륙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남조선이 결국은 해방되리라고 믿었다고 한다. 청년 조직을 결성하고 밤마다 사상교육에 열을 올리던 아버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그 해 늦가을 월북을 결심했다.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 했던 청년들 중 대여섯 명이 함께 마을을 떠났다. 그들 중에는 젊은 치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도 더러 끼여 있었다.

김 형사와 동행하지 않는 외출은 다소 낯설기는 했지만 불편하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처음 홀로 외출한 날 경상북도 성주군청과 대구시 달서구청을 오가느라 꼬박 하루를 보내야 했다. 북조선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가 알려준 경상북도 성주군의 주소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일대가 대구시 달서구로 편입된 것이 벌써 이십 수년 전이라고 했다. 구청에 전화를 냈지만 ‘그렇게 해서는 바뀐 주소를 알 수 없다’는 담당자의 사무적인 대답만 들었다. 급한 마음에 성주군에서 택시를 타고 대구의 구청을 찾아갔을 때는 퇴근 시간이 임박했을 때였다. 담당자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북한에서 왔어요?”
“네, 이 주소가 저희 아버지 고향입니다.” 나는 짐짓 그의 눈을 피하며 수첩을 꺼내 주소가 적힌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수첩을 받아 든 구청 공무원은 주소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구시로 편입됐다고 하던가요?”
“네, 성주군청에 갔더니 벌써 오래 전에 대구시로 편입됐다고 합니다.”
“그러면 시청으로 가보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알 수가 없어요. 우리는 대구시로 편입된 이후의 행정기록만 있어요. 그 이전 기록은 대구시청에 있을 거요.”

구청에서 나왔을 때 어둠이 적병처럼 도시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둡고 시끄러웠지만 남조선의 거리는 중국에서처럼 위험하지 않았다. 호각을 불며 달려와 나를 체포할 사람도 없었고 거미처럼 숨어 탈북자를 노리는 포상금족들도 없었다. 술에 취해 휘청대거나 늦은 밤거리를 배회하지 않는 한 남조선의 밤거리는 안전했다. 불을 밝힌 차등이며 가로등도 낯선 거리의 불안감을 씻어주었다. 대구의 밤거리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싫든 좋든 앞으로 오 년을 살아야 할 곳이었다. 어쩌면 오 년이 지나고 거주지 제한이 풀린다고 해도 나는 줄곧 이곳 대구에서 살는지 몰랐다. 어쨌든 이 도시는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나의 고향인 셈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섰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났고 거리는 한산했다. 커다란 원형 빗자루를 돌리며 느릿느릿 달리는 청소차를 내가 탄 택시가 앞질렀다. 진공청소기를 부착한 청소차는 찌꺼기 한점 남기지 않고 거리를 빨아들였다. 휴대폰 벨이 울린 것은 택시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을 때였다.
전화를 낸 사람은 뜻밖에도 하나원 동기인 박희도였다. 그는 다짜고짜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만나면 알게 된다며, 내게 손해나는 일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가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지만 나는 그가 말한 ‘손해나는 일은 아니다’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북조선 사람들이 손해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할 때는 무엇인가 거래를 원할 때였다. 그는 분명 그럴 듯한 거래를 제안하겠지만 내게는 손해나는 일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박을 피하고 싶었다. 그것은 비단 박뿐만 아니라 북조선에 온 사람들 모두, 특히 하나원에서 함께 남조선 적응교육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었다. 사선을 넘어온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은 지나치게 뻔뻔스럽고 폭력적이었다. 그들이 나처럼 엄격하고 자부심 강한 아버지의 훈육을 받지 못했음을 인정하더라도 나로서는 그들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박은 일방적으로 약속시간을 정했다. 저녁 여섯 시. 동대구역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후 그는 전화를 끊었다. 교육을 마치고 경기도에서 대구로 함께 내려온 우리가 헤어진 곳이 동대구역이었다. 그는 장소를 설명하는데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경기도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은 동기생 오십 명 중 대구에 정착할 것을 명령받은 사람은 박과 나를 비롯해 네 사람이었다. 박은 서울을 원했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먼저 탈북해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가 서울에 정착해야 한다고 내세운 이유였다. 남조선에 온 북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기를 희망했다. 희망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서울이 아니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박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지방 도시를 희망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에 불과했다. 대구를 희망한 사람은 나뿐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인천을 희망했다. 그들이 인천을 택한 것은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동기생 오십여명 중에 서울에 살게 될 사람은 육칠 명에 불과하다는 하나원 직원의 귀띔이 있었고 그럴 바에야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을 선점하자는 계산에서였다. 남조선의 서울은 북조선의 평양과 마찬가지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강박관념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달서구청보다 상급 기관이었지만 대구시청의 건물 규모는 구청보다 오히려 더 작았다. 건물을 에워싸듯 서 있는 리기다소나무는 겨울 날씨를 잊게 할 만큼 푸르렀다. 민원실 안은 따뜻했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이가 제법 혼란스럽게 실내를 뛰어다녔지만 누구도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으로 누가 그 아이의 부모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희고 도톰한 볼에도 불구하고 여자아이는 납작한 코와 가느다란 입술 탓에 귀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무원들은 모두 민원인을 상대하거나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에 열중했다. 나이 지긋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공무원 하나가 멀뚱히 민원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향해 민원인과 공무원의 영역을 구별짓는 데스크에 다가섰을 때 여자아이는 내 오른쪽 다리 밑으로 파고들어 왼쪽 다리로 빠져나간 후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이에게 던졌던 눈을 거두어 눈앞에 앉아 있는 공무원을 바라보았다.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쩐지 낯설었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다. 요행히 내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시청까지 찾아온 이유를 구구절절 읊었다.

“요컨대 탈북자라는 말이죠?” 그가 깍지 낀 두 손 위에 턱을 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그렇죠.”
“그런데요?”
“그, 그러니까.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이 대구시 어디랍니다. 원래는 경북이었는데….” 수첩을 꺼내 아버지의 고향집 주소가 적힌 곳을 펼쳐 내밀었다.
“원래 주소는 여기인데, 이곳이 이십여 년 전에 대구시로 편입됐다고 합니다. 현재 주소가 어떻게 돼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아버지의 고향이니 한번 찾아가보고 싶습니다. 자식된 도리죠.”

공무원은 내가 내민 수첩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내게 어떤 대답이나 질문도 없이 옆에 앉은 젊은 여자 공무원에게 수첩을 넘겼다.

“여기가 지금 어디인지 찾아봐요. 행정조정실에 가서 행정구역 변동 기록부를 살펴보면 될 거야.” 여자는 나이든 공무원이 건넨 수첩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내 수첩을 받아든 여자는 넓은 사무실을 가로질러 뒤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에 눈을 붙박고 있는 내게 나이 많은 공무원이 말을 건넸다.
“그래 한국에는 언제 왔소?”

나는 앞에 앉아 있는 공무원과 조금 전에 내가 준 수첩을 들고 여자 공무원이 사라진 작은 문을 번갈아보았다. 그 문이 다시 열렸고 한 남자가 검은 서류철을 들고 들어왔다.
“작년에 왔습니다.”

여자가 사라진 뒤쪽 문에 눈을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남조선 사람의 말에 그처럼 간단하고 무심하게 대답해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혹시 그들의 말속에 함정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하며 이전에 뱉었던 말과 다르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여자 공무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이 많은 공무원은 북한에 관해 많은 것을 물었다. 특별히 그가 관심을 보이는 부분은 북조선에는 정말 굶어죽는 사람이 많은가 하는 것과 탈북하다가 잡힌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하는 것인가 하는 것들이었다. 몇 차례 사무실 뒤편으로 난 작은 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지만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조선 사람들의 궁금증은 대체로 내가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들에 집중돼 있었다. 굶어죽은 사람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굶은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얼마나 현실감 있게 들릴까. 음식 쓰레기가 넘쳐 해마다 몇 조원씩 버린다는 남조선이 아닌가. 총살, 공개처형에 관해서도 남조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들은 잔인하게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국한되었다. 재판이나 징역, 교화교육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처형되는가, 죽은 자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정말 길바닥에는 시체가 즐비한가 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남조선 사람들이 북조선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잡히면 코를 꿰어 압송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란 말이요?”
“나는 그런 걸 본적이 없습니다. 남쪽 사람을 만나거나 예수를 믿거나 김정일이나 당을 비판한 사람만 아니면 도 집결소에서 며칠 안에 풀어 줍니다. 먹고살겠다고 국경을 넘어간 인민들은 그냥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김정일이 방침을 내렸습니다.”

공무원의 얼굴은 심드렁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중국에서 잡힌 북조선 사람들은 모조리 코에 줄을 꿰어 끌려간 뒤 총살당한다고 들었던 모양이다.
“주사님, 이 주소는 지금 대구시 소유 부지로 편입돼 있습니다.” 내 수첩을 가지고 뒷문으로 사라졌던 여자 공무원이 나이 많은 공무원에게 수첩과 복사한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수첩과 서류를 받아 든 공무원은 이번에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전명호씨, 이 주소는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 지금 위생 매립소 부진데….”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짐짓 놀라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간 나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남의 집에 숨어 들어가 사람 키만큼 땅을 파고 물건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할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삼촌이나 사촌형제들이 그 집에 살고 있다고 해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네가 아니에요. 위생 매립소란 말이요. 주변 아파트 단지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오.” 공무원은 그 참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한번 가보아야겠지요. 아버지가 어떤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지 확인하고 싶거든요. 주소를 좀 알 수 있을까요?”

물건이 눈앞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공무원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노천 쓰레기장이라면 일주일이든 이주일이든 마음 푹 놓고 땅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거라면 걱정 없어요. 주변은 개발이 전혀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뛰어다녔던 산이나 들판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거요.”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귀걸이를 단 젊은 택시 기사는 두 번이나 차를 세워 길을 묻고 나서야 위생 매립장 입구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대구시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외딴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갈까요?”

화살표와 함께 대구시 위생 매립장 이백 미터라고 쓰인 이정표 앞에 택시를 멈춘 기사가 물었다. 위생 매립장 입구는 우리가 달려온 길에서 오른 편으로 꺾인 좁은 도로 안쪽에 있는 모양이었다. 왼쪽으로는 꽤 넓은 강이 흘렀다. 겨울 가뭄에 군데군데 섬이 생겨나 있었다. 어젯밤 조금 내린 비로는 강물이 불고 말 것도 없었던 모양이다. 섬에 자란 갈색 잡풀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요. 여기서 내리겠소.”

마을로 통하는 이 차로 길은 택시에서 내린 사차로 도로와 티자 모양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을 솔터 마을, 어둠을 틈타 동네 청년들과 도망치듯 빠져나왔을 길을 나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 들어갔다. 길은 자동차 두 대가 비켜 지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길 양편으로 나이 많은 나무들이 바람에 앙상한 가지를 내맡기고 있었다. 군데군데 예전엔 틀림없이 농로였을 비포장 길이 숲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포장길을 따라 이백 미터쯤 들어가자 헐벗은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사람을 반겼다. 감나무와 대추나무는 사람이 사는 집 주변에 흔한 법이다. 그렇다면 여기 어디쯤 마을 초입의 민가가 서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 닿았다고 생각하자 전신에 싸한 긴장감과 요의가 밀려왔다.

‘환경친화 첨단대구 건설’. 육중한 철문 위로 아치형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철문 오른 쪽으로 작은 철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쪽에 유리문이 달린 경비실이 보였다. 아치형 간판 너머로 회백색 건물 두 동과 높다란 굴뚝이 서 있었다.

가능한 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일을 마무리짓고 싶었다. 더구나 제복을 입은 경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철문을 통과하자면 의심을 사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아치형 간판에서 오십미터쯤 못 미친 즈음에 숲으로 바로 이어진 등산로가 나 있었다.

산 정상을 향해 비스듬히 난 등산로를 이백 미터쯤 걸었을 무렵 녹색으로 칠한 쓰레기차 한 대가 육중한 철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등산로의 방향에 따라 위생 매립장의 육중한 철문과 아치형 간판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발아래 부서진 낙엽들이 사람의 왕래가 잦은 길임을 말해주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매립장이 다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등산로를 따라 십여 분을 걸은 후였다. 매립장의 철문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눈앞에 있던 굴뚝이 뒤편에 서 있었다. 산길을 따라 이미 철문 안쪽에 들어 선 것이다. 매립장 내부 전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두툼한 오리 털 방풍복 탓에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매립장 반대 편 산 아래로 대단지 아파트촌이 보였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매립장은 장관이었다. 족히 이십 만평은 넘어 보이는 매립장 둘레로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었고 매립이 끝난 쪽은 이미 흙을 덮었고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었다. 마치 잘 손질해놓은 정원을 보는 것 같았다. 햇볕이 잘 드는 쪽에는 일찍 도착한 봄이 누런 겨울 얼룩들 사이에 여장을 푸는 중이었다. 어쩌면 그 녹색 자국들은 아직 떠나지 못한 지난 가을인지도 몰랐다. 평평하게 잘 다듬어 놓은 구릉 군데군데 빗물이 새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기역자로 꺾어놓은 가스 분출공이 보였다.

시청 공무원이 ‘위생매립소 부지’라고 했을 때, 나는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널따란 공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깊고 널따랗게 파놓은 웅덩이와 정사각형으로 압축되어 매립을 기다리는 커다란 쓰레기더미들이었다. 어디에도 연탄재나 바람에 흩날리는 쓰레기조각 따위는 없었다. 주변을 점령하고 있을 줄 알았던 악취도 없었다.

마을은 흔적조차 없었고 잘 정리된 구릉만이 파도처럼 넘실댔다. 눈앞에 보이는 잘 정리된 정원은 논밭이 있던 자리이고 어딘가에 예전엔 마을이었을 터가 따로 있을 것이라며 구릉과 구릉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집이 있던 자리를 찾아내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기보다 더 어려워보였다. 설령 집이 있던 자리를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두껍게 덮인 흙과 압축된 쓰레기를 파헤치고 물건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집이 있어야 할 자리, 적어도 집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자리는 괴물처럼 늘어선 쓰레기 더미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담배를 물었다. 어두운 중국의 골목길을 숨어 다니던 기억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차가운 바람에 서늘해졌던 머리가 텅 빈 듯한 공동감으로 바뀌었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싶었다. 꿈이란 것이 워낙 그런 법이지만 참 허망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아버지께 중국으로 가겠노라고 말씀드렸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는 나도 남조선 행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기침에 시달려온 아버지는 급기야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절뚝거리며 작업장으로 나서던 어머니마저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그런 두 분을 남겨놓고 홀로 남조선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당원이 되기는 틀렸고 무작정 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중국에서 돈을 좀 모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라도 해보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남쪽으로 가거라.” 아버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아버지는 배고픔을 참지 못할 만큼 나약한 분이 아니었다. 가족 중에 누군가 굶어서 죽는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도둑질을 한다거나 자신의 신념을 버릴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육십여 년 전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랬듯 아버지도 내게 아버지의 신념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주소가 적힌 작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경상도 성주군 산 584번지’.
아버지의 고향집이며 아버지가 북조선을 향해 떠나던 날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삼촌과 이모와 살았다는 곳. 마을 앞에는 논과 밭이 널찍이 펼쳐져 있었고 그 논밭 너머 신작로를 따라 커다란 강이 흘렀다는 곳. 마을은 너른 들판 안쪽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야트막한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윗대로부터 지주였으며 대여섯 집을 빼면 사십여 호에 이르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집안의 소작농으로 살았던 곳. 육십여 년 전 아버지가 떠나온 고향 마을은 대략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향집이 있어야 할 자리는 쓰레기 매립장으로 변했고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은 심드렁한 구릉으로 내 발치 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집을 팔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집을 찾거든 광으로 썼던 곳을 파 보아라. 할아버지가 내 몫으로 묻어둔 물건이 있다. 할아버지는 큰 부자였고 현명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늦게라도 내가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시면서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을 것을 묻어두겠다고 하셨다. 물건을 찾아내거든 네 동생을 찾아서 남쪽으로 데려가도록 해라.”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어째서 세월을 그처럼 가볍게 여긴 것일까. 발아래 보이는 널따란 쓰레기 매립장이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라는 생각에 설명하기 힘든 슬픔이 밀려왔다. 아름다운 촌락이었을 마을, 어둠을 틈타 집을 떠나는 아버지를 눈물로 배웅했을 할머니,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자식을 위해 금괴를 묻어 놓고 기다렸던 할아버지는 삼촌에게 어떤 유언을 남겼을까. 끝내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을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남조선에 도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치파오를 두른 채 중국 남자들 틈에서 웃음을 팔고 있을 정녀도,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아버지도, 기분 나쁘고 묵직한 통증만 남은 어머니의 다리도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남조선에 도착한 후에는 하나원의 교육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마침내 대구로 내려온 후에는 김 형사의 집중 보호관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다가올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 앞에 초조하게 굴 이유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잊히거나 엷어질 고통은 얼마나 달콤한 고통인가. 그러나 지금 내가 맞닥뜨린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채이자와 같은 것이 돼 버렸다.

정월의 어둠을 헤치고 산길로 마을을 빠져나오던 밤과 어렵게 얻은 일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햇볕이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더위 속에서도 빠지지 않고 나갔던 베이징의 공사장, 시궁창의 쥐처럼 아무도 모르게 숨어들곤 했던 옌지의 어둡고 습기 찬 쪽방,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남조선….

내가 북쪽 고향의 그 모든 과거와 그처럼 쉽게 이별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만나리라 약속했던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였다. 갑자기 너무나 막연하고 막막한 늪 속으로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산 정상의 앙상한 느티나무에 기댄 채 매립장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맞았다. 그 바람에는 쓰레기냄새나 황금냄새가 아닌 엷은 살충제 냄새가 묻어 있었다. 겨울바람이 귓전을 윙윙 울리며 지났다.
버스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그간의 상황을 정리했다. 상황을 정리하는 버릇 또한 도망자가 되어 중국을 떠돌던 시절에 밴 습관이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금괴는 없다. 아니, 거기 금괴가 묻혀 있기는 한지 알 수 없다. 금괴가 묻혀 있다손 치더라도 나와는 무관한 것이다. 금괴는 땅속 깊은 곳에 묻혀 있으며 그 위에는 단단하게 압축된 쓰레기 덩어리가 난공불락의 성처럼 쌓여 있다. 지금도 도시 쓰레기를 실은 차들은 쉴 새 없이 매립장으로 들어와 쌓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쓰레기의 성은 견고해질 것이다. 매립장이 다 차면 금괴와 쓰레기 덩어리를 품은 땅 위로 나무와 풀이 자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무가 된다. 나는 대체 어째야 하는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약속시간에 맞추어 동대구역에 도착했지만 박은 나와 있지 않았다. 출근시간이나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북조선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똑같은 식량 배급표를 받을 것이 뻔한데 일찍 나와서 열심히 일할 필요는 없었다. 약속 시간에 일찍 나와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였다. 박은 아마 이십분 혹은 삼십분쯤 지나서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날 게 뻔했다.

역사 앞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살폈다. 역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 총총걸음으로 내가 앉은 벤치 앞을 지났다. 좀전에 내 앞을 지나쳤던 사람들이 사라진 쪽에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와 내 앞을 지난 후에도 시간은 채 십 분이 지나지 않았다. 멀뚱하게 서 있기보다 걷고 싶었다. 역사 오른 편으로 육교가 나 있었다. 육교 아래 가게의 쇼 윈도우에 반쯤 반사된 내 몰골을 보았다. 강바람과 산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 같았다. 손가락을 빗처럼 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한국에 오기를 원했습니까?”

남조선의 심사관들은 여러 차례 기계음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할는지 훤히 알고 있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물론 나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불안한 얼굴로 판에 박힌 대답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내심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다시 역사 앞으로 돌아왔을 때 한 떼의 비둘기가 먹이를 쪼느라 길을 막고 있었다. 놈들은 사람이 다가서도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왜 성가시게 구느냐는 듯 힐끔힐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처럼 살이 오른 몸뚱이로는 날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북조선에서는 좀처럼 도심에서 비둘기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남조선 거리에 지천으로 널린 먹잇감이 비둘기를 부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디선가 또 한 떼의 비둘기들이 푸드득 날아와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서는 중이었다.

박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역 근처 버스 정류장과 택시 승강장을 살폈다. 그는 틀림없이 엄청나게 변했을 것이다. 남조선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 보았던 그는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한국의 연예인쯤으로 짐작했다. 단체로 입국 절차를 밟느라 출입국 심사대 앞에서 대기 중일 때에야 그가 우리와 일행이며 북조선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박은 놀랍게도 역사 안에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커다란 검은 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먼 곳을 다녀오는 길 같았고 노랗던 머리카락은 다시 검게 변해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오?”
“으응, 서울에 좀…”

박은 과장된 몸짓으로 내 손을 부여잡았다. 우리는 오년간 거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주지 제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다. 대구를 벗어나 여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했다. 대구에 도착한 지 육개월이 지났으니 그를 감시하는 형사도 이제 매일 그를 찾거나 전화를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직 서울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박이 손에 쥐었던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우리는 역 주변 식당에서 소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저녁을 먹자고 말했지만 그는 밥은 필요 없다며 소주를 고집했다.
“마지막 술자리가 될 거야. 그러니 마시자고.”
박은 병따개를 두고 이빨로 병뚜껑을 따 내 잔을 먼저 채웠다. 그리고 스스로 제 잔을 채워 목마른 사람처럼 단숨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이라니?”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고 서울에 살 수 있도록 사업이라도 한 것일까. 박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는 뇌물과 여자로 못 푸는 문제는 세상에 없다고 확신했다. 하나원에서도 그랬다. 서울에 배치 받기 위해 그는 하나원 교육 동기생 중 얼굴이 예쁜 탈북 여성을 꼬드겨 하나원 쪽 선생을 상대로 사업을 시도했다. 그 사업이 성공했는지 어땠는지 모른다. 사업을 꾸민 것은 박이었지만 결과는 엉뚱했다. 얼굴이 예뻤던 그 여성은 서울로 배정 받았고 박은 대구에 배정을 받았다. 박은 그 일을 두고 ‘죽 쑤어 개 주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 떠난다.”
그가 소주잔을 홀짝 비웠다.
“서울로?”
“아니….”
“그럼?”
“호주로 갈 거이야. 벌써 사업 다 끝냈어.”

그는 이번에도 스스로 소주를 따라 마셨다. 호주로 떠난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남조선이든 호주든 고향을 떠난다는 데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가능성이었다. 북조선 사람들이 중국이나 몽골, 동남아를 통해 남조선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많았지만 호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어떻게 간다는 말이오?”
“사업해서 안 되는 게 뭐이가 있갔어? 다 손봐 뒀어.” 불그스름해지기 시작한 그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퍼졌다.
“서울에 살 수 없게 되어서 그러는 거요?”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아. 어디에 살아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야, 하긴 뭐 서울이면 좀 낫기는 하갔지만.”

그에게 남조선은, 특히 서울은 기회의 땅이었고 노다지를 캘 수 있는 곳이었다. 남조선이 노다지인 것은 박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남조선행을 택한 북조선 사람들에게 남조선은 노다지를 약속 받은 땅이었다. 그러나 남조선에 도착한 것이 아홉 달 전이었고 그 사이 적어도 박이나 내게 그런 꿈은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호주로 가는 게 그렇게 쉽갔어요?”
“이거 와 이러네, 이래봬도 몽중 국경을 걸어서 넘은 사람이야.”

박은 중국에서 몽골을 통해 남조선으로 왔다. 이 년 가까운 도망자 생활을 했지만 교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손쉽게 남조선으로 들어온 나와 합류한 것은 마지막 입국 단계에서였다. 박은 국경 수비대를 피하느라 철조망이 처진 사막에서 이틀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엎드려 숨어 있었다고 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떠벌리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다소 윤색된 면이 있었겠지만 중국과 몽골 국경을 걸어서 넘는 일이 쉬운 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너나 나나 잘먹고 잘 살았다면 고향을 떠났갔네? 떵떵거리며 못 살 바에야 굳이 남조선에서 살 필요가 뭐이가 있갔어? 받은 돈도 벌써 다 써버렸어. 완전히 비렁뱅이야.”

박은 나름대로 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세차장, 식당, 염색공장, 안경공장, 건설현장, 자동차 정비공장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죽을 고생을 했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정착금으로 받았던 돈마저 다 써버렸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푸념했다. 박의 이야기는 우스꽝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기껏 육개월 동안 열 서너 가지의 일을 가졌다면 그가 어떤 태도로 일에 임했을는지 뻔한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불평 많고 불성실한 사람이었다.

“도무지 체질에 안 맞아서 못 해 먹갔어. 내가 그 따위 한심한 일이나 하자고 목숨 걸고 국경을 건넜갔어?” 그 말은 내게 둔탁한 충격으로 와 닿았다. ‘그깟 한심한 일이나 하자고 내가 목숨 걸고 국경을 건넜갔어?’

“내가 사실은 부탁이 있어서 명호 너를 보자고 한 거이야. 하지만 너한테도 손해나는 일은 아닐 거이야.”
박은 반쯤 든 소주잔을 비우고 내게 잔을 내밀었다. 돈 이야기를 꺼내면 잘라 거절할 작정이었다. 돈을 빌려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상대가 박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북조선 출신 누구와도 행동을 같이하거나 돈 거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당한 사기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호주는 너무 멀지 않소?”
호주에 대한 관심이나 그의 장래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말은 물론 아니었다. 내 말에는 그가 쏟아낼 부담스러운 부탁을 적당히 무마해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호주로 함께 떠날 생각이 없다. 그런 만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수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느냐는 의미였다. 게다가 받은 정착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절반 이상을 북조선에 남은 부모님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정녀를 수소문하기 위한 계약금으로 써버렸다. 계약금 조로 내 돈을 가져갔던 그 자들이 내 편지를 아버지에게 전달했는지 알 수 없는 데다 정녀 소식도 묘연했다.

“북중 국경을 넘었을 때 명호 넌 남조선까지 올 것이라고 생각했네?” 박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찬가지야. 남조선이든 호주든….”
“떠날 준비는 다 된 거이오?”
“나는 항상 튈 준비가 돼 있어. 그거야 명호 너도 마찬가지갔지만?”

박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나는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기껏해야 박이 아는 사실이란 중국을 떠돌다 남조선으로 들어온 북조선 출신들의 정착하지 못하는 습관 정도일 것이다. 용케 남조선 행에 성공한 사람들은 박의 말대로 언제나 튈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었다. 박의 말대로 나도 언제나 약간의 현금을 준비해두었고 위조서류를 제공해 줄 사람들과 한 다리 건너서라도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머무는 곳과 정을 맺지 않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장소든 직업이든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우울해졌다. 결국 나는 정착을 꿈꾸는 농부가 아니라 황금을 찾는 떠돌이였던 것이다. 가슴에 묵직한 통증같은 것이 느껴졌다.

박은 내가 자신의 가전제품이나 가구 따위를 사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처음 샀던 가게에 되팔려고 했지만 원래 가격의 십분의 일도 계산해주지 않으려고 하더란 말과 함께 그들은 순 도둑놈들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여태 가전제품이나 가구를 들이지 않았음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박의 부탁이 그 정도라는 사실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중고지만 깨끗해. 내가 샀던 가격의 절반에 모두 넘기지. 뭐 네게 있는 것은 빼고 없는 것만 사도 좋아.”
내게 가전제품 따위는 없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냄비, 전화기가 내가 지난 육개월 동안 사들인 살림의 전부였다. 그날 밤 우리는 엉망으로 취했다.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진 내 미래를 위로했고 박은 청산하기로 마음먹은 과거를 닥치는 대로 갈가리 찢었다.

다음 날 박은 가전제품과 가구를 실은 일톤 트럭을 타고 내가 사는 임대 아파트에 나타났다. 함께 온 트럭 운전기사는 단 한번의 전화 통화로 용케 집을 찾았다. 박이 싣고 온 가구 중에는 애당초 우리 이야기에 없었던 물건까지 포함돼 있었다. 빨래 건조대, 전자 레인지, 다리미와 중고 에어컨, 그리고 박이 입던 옷은 내게 별 필요가 없었다.

“명호 너한테는 많이 필요한 물건이다 싶어서 가져왔어. 전부 합쳐서 오십 만원만 더 얹어 주기오.”
박은 크게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객쩍은 웃음을 흘리며 가구를 들여놓았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지만 박은 말이 없었다. 그날부터 박은 내 집에서 함께 머물렀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세들어 살던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이었고 물건이 팔릴 때까지 버티다가 물건과 함께 떠나온 것이었다. 당장에라도 김 형사가 찾아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기우였다. 그림자처럼 내 주위를 맴돌던 김 형사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원래 내 주변에 머물기는 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사흘 뒤 나는 박과 함께 서울 행 기차를 탔다. 김 형사의 허락 없이 대구를 벗어나는 것이 께름칙했지만 동행해달라는 박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박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경찰의 검문에 걸린다고 해도 일반 경찰들이 우리를 알아볼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탈북자들을 감시하는 기관과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기관이 달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박은 덧붙였다. 박이 호주 대사관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해 두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김 형사가 연락을 뚝 끊었다는 사실도 내게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기차의 식당 칸에서 점심을 먹었다. 박은 말이 없었고 창밖으로 희뿌연 비닐 하우스들이 빠르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낮게 깔리기 시작한 구름은 당장에라도 진눈깨비를 뿌려댈 것 같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하늘은 심상치 않았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빠트린 채 집을 나선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박의 재촉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기차는 규칙적인 소리를 쏟아내며 달렸다. 내 염려와 달리 식당 칸에서도, 자리에 돌아온 후에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스포츠 신문에 눈을 박고 있거나 잡담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아니면 까닥까닥 졸 뿐이었다.

박은 여러 차례 서울을 다녀가기라도 한 듯 복잡한 서울에서 능숙하게 표를 끊었고 지하철을 탔다.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육개월 동안 꼼짝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허송세월을 보낸 내가 지독히 어리석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이 멈추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우르르 빠져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박과 나는 높은 빌딩 앞에 섰다. 무장한 경비병이 지키고 있을 줄 알았던 호주 대사관은 예상과 달리 서울 도심의 높은 빌딩 십일 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험회사와 자동차 영업점, 은행, 레스토랑이 함께 들어선 빌딩이었다. 빌딩의 회전 출입문은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았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빌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이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을 마주잡기는 했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렇게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이오?”
박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다.
“들어간다고 한들 호주 대사관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주갔시오?”
아무래도 이건 너무 싱겁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쉽게 호주로 도망칠 수 있다면 남조선에 사는 범죄자나 부랑자들이 너도나도 호주로 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못 봤네? 동남아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사이에서도 호주 망명이 줄을 잇고 있어. 배를 타고 들어와서는 죽겠다고 나자빠지는 데 어쩔 거이야? 죽이네 살리네 해도 결국 그렇게 호주국민이 되는 거이야.” 박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남조선행을 눈앞에 두었을 무렵 내 얼굴이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는 서울 땅이 아이요? 호주 대사관에서 못 받아들이겠다고 내쫓아 버리면 그만 아이요?”
박은 내 말에 킬킬킬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가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꺼내 보였다. 붉은 도장이 찍힌 갖가지 서류와 병원 진단서였다. 서류들 사이에 끼여 있던 사진 몇 장이 땅바닥으로 흘렀다.

“이거이 내가 지난 두 달 동안 준비한 것들이야. 남조선 경찰한테 두들겨 맞아서 생긴 상처를 찍은 사진과 진단서, 해외여행을 신청했다가 기각 당한 서류, 그리고 내가 살았던 방을 찍은 사진이야. 아주 그럴 듯하지 않소?”

사진은 대체로 음습하고 일그러진 박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박은 그것으로 망명 준비는 끝났다고 말했다.
“정말 남조선 경찰들한테 두들겨 맞아서 생긴 상처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박은 싱거운 웃음을 흘렸을 뿐 대답이 없었다.
“명호 너는 내가 대사관으로 들어간 후에 신문사와 방송국에 전화를 좀 해 줘야갔어. 호주 대사관에 탈북자 한 사람이 망명 신청을 했고 지금 실랑이가 벌어졌다고 말이야. 이 빌딩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너를 소개하고 지금 호주 대사관 안에서 난리가 났다고만 해주면 끝이 나는 거디.”
박은 전화번호 대여섯 개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그는 자신이 호주 대사관으로 들어가고 정확히 이십분 후에 신문사와 방송사에 전화를 내 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그동안 대사관 안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만 덧붙였다. 박이 굳이 나와 동행을 원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던 내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회전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박이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그는 왼쪽손목을 들어 시계를 내 보였다.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 방송사와 신문사에 전화를 내라는 말이었다. 그의 인사를 맞이한 내 손이 반쯤 올라왔을 무렵 박은 돌아서서 총총 걸음으로 멀어졌다. 박이 유리창 너머로 사라지고 난 후에도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부슬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먹구름이 깔리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무엇인가 빠트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아마 우산을 챙기지 못한 때문인 것 같았다. 하기는 우산을 챙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기는 했다. 집에 우산 따위는 없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나는 좀 전에 박이 숨어든 빌딩 안으로 우선 몸을 피했다. 겨울비답지 않게 제법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 조두진
1967년생 소설가.
장편소설= ‘도모유키’ ‘능소화’ ‘아버지의 오토바이’ ‘몽혼’ ‘북성로의 밤’ ‘결혼면허’
소설집= ‘마라토너의 흡연’ ‘진실한 고백’

조두진  earf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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