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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욕망을 내려놓으라

기사승인 2018.03.15  0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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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어(位相語)는 남녀·연령·직업·계층의 차이에 의하여 독특하게 쓰이는 어휘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자기 지위에 대한 자의식이 짙게 배어있다. 아이의 말투를 쓰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어른스러운 말을 사용하는 아이도 있다. 말이 권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익힌다. 어른들이 엄격하게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욕설을 내뱉는 것은 욕이 일종의 권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욕은 일상어가 갖지 못한 실행력이 있다. 상대방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만들 수도 있고, 비굴한 굴종의 웃음을 짓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매력적인 말을 왜 삼가야 한다는 말인가? 

쾌락에의 의지 못지않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 권력에의 의지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배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나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또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달콤한가. 마치 아바타처럼 나의 말을 수행하는 사람이 많다고 느낄 때 사람은 유사 전능자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진다. 프랑스 사회심리학자인 귀스타브 르봉은 대중을 움직여 여론을 좌우하는 ‘위세’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위세란 간단히 말해 어떤 개인이나 작품 혹은 이념이 우리 마음에 행세하는 지배력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누군가의 위세에 눌린 이들은 비판적 사유를 하지 못한다. 위세는 존경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처럼 위세를 누리는 이들이 또 있을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일종의 권력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 사람들의 가슴에 떨어지면 모종의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상투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 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종교인들은 자기 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검증하기 어려운 경험을 운위하거나, 그 말에 어떤 광휘를 덧입힌다. 두려움을 자극할 수도 있고 복을 약속할 수도 있다. 종교적인 언어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그 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살리는 말도 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발설하신 말은 에너지로 가득찬 말이었다. 그 말은 혼돈을 잠재우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다. 죽음의 자리에 섰던 사람들을 생명으로 유인하기도 한다. 예수가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다는 것이었다. 그가 전한 말의 내용이 새롭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말이 수사학의 세 요소라는 로고스와 파토스 그리고 에토스가 적절히 결합되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의 말이 권위 있는 말로 들렸던 까닭은 그의 말과 존재가 틈 없이 일치하고 있음을 듣는 이들이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존재 그 자체로부터 발설된 말이 아니면 진정한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와 바리새인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진리를 권위로 삼았지만, 바리새인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았다.” 지나친 단순화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권위를 뜻하는 헬라어 ‘엑수시아’는 ‘~로부터’를 뜻하는 ‘엑스‘와 ‘본질’을 뜻하는 ‘우시아’가 결합된 말이다. 진정한 권위란 본질에 뿌리 내리고 있을 때 발현된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 말은 달리 해석될 여지가 많다. 본질로부터 벗어난 말들이 권력을 행세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계기에 의해서든 자기에게 분유된 권력에 도취되어 타자들을 지배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종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 권력이 스러질까봐 전전긍긍한다. 스스로 신화의 의상을 걸치기도 한다. 종교인의 타락은 그렇게 시작되고 또 강화된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권력이 된 이들이 있다. 매스컴에 의해 조명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이들 말이다. 대중적 지지를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기꺼이 수납하는 순간 그는 우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권력이 자기에게 주어졌다면 이전보다 더 두려워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늘 명심해야 한다. 윤동주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담긴 자기 얼굴이 욕되다고 여긴다. 그래서 밤이면 밤마다 그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고 다짐한다. 닦고 또 닦아도 맑아지기 어려운 게 마음인데, 닦지는 않고 자꾸 화장만 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살 수밖에 없다. 지배의 욕망 혹은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의 길을 따라 갈 수 없다. 오그랑이 주제에 지도자연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게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김기석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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