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톨릭 성구점에서 탁상용 십자고상을 하나 구입했다. 개신교 교인들에겐 다소 낯선 십자고상(十字苦像)이란 말은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있는 조형물을 뜻하는 말이다. 가톨릭 십자가는 개신교 십자가와 달리 대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형상의 십자가다. 혹자는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하고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는 신학적 차이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것은 성상숭배를 반대했던 개신교 전통과 더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바울이 말했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좀 더 가까이 삶 속에 두고자 하는 마음에 단촐한 십자고상을 하나 구입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우연인지, 바로 직후에 심히 자존심 상하는 어떤 일을 겪게 되었다. 무시당했다는 기분에 깊이 상처받은 후 마침 눈에 들어온 책상 구석의 십자고상을 바라보면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해보았다. “그래, 주님이 당하신 무시에 어디 감히 비할 만하겠어? 참자. 참자.” 한창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가만있자, 참다니? 참는다는 건 결국 내가 참는다는 거 아닌가. 내가 한다? 뭔가 방향이 틀린 것 같은데?” 무언가를 참는다는 것이 여전히 내 의지의 문제, 나 중심의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고난’이라는 단어 자체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고난,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어로는 passion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라틴어 passio(파씨오)로부터 온 말이다. 그리고 이 라틴어의 동사형 patior(파티오르)는 ‘당하다’, ‘견디다’라는 뜻이다. ‘수동형’을 뜻하는 영어 passive 역시 passion과 마찬가지로 patior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고난’이라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난’이라는 단어는 우선적으로 ‘고통’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할 때조차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 고난 대신 수난(受難), 즉 받을 수(受) 자를 쓴다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passion의 본질은 고통이 아니다. 그 단어와 함께 제일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은 ‘당함’, 철저한 당함이다.
passive라는 뜻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은 철저한 수동성에 그 본질이 있다. 의지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오는 모든 치욕과 고통을 그저 당하도록 허락하고 받아들이는 수동성,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 고난의 본질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말 ‘고난’은 원래의 단어가 지녔던 이 수동성을 실어 나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당함, 무력하고 철저한 당함. 진정한 그리스도 고난의 비밀은 어쩌면 바로 이 철저한 수동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지상의 삶 역시 수동성의 연속이었다. 고난이든 죽음이든 영광이든, 그분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오도록 하셨고, 자신에게서 일어나게 하셨다. 부활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이 적절치 못하게 번역한 능동태 ‘일어나셨다’ 역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수동태인 ‘일으킴을 당하셨다’이다. 주님은 언제나 철저한 수동성을 사셨고 이 수동성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러니 주님의 고난을 따르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당하심을 따르는 것일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는 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당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벧전 2:21)
이진경 jinkyung.lee@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