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 (1)

기사승인 2019.08.01  00:16:55

공유
default_news_ad1
article_right_top

연해주 한인들은 일본군과 싸웠고, 혁명군(적군)을 도와 반혁명군(백군)과 싸웠다. 일본 군대가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철수하고, 내전도 끝났다.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과 국가 대 국가로 협상을 했다.

소련 국적을 갖지 못한 연해주 한인들은 소비에트 인민인가 아니면 일본인인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으므로 연해주 한인들은 일본에 속한 신민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연해주 한인들이 볼셰비키를 위해 싸웠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한인은 이제 혁명 동지에서 ‘골치 아픈 존재’가 되고 있었다.

연해주 한인은 이미 블라디보스톡 지역 인구의 4분의 1을 넘었다. 그렇지만 1923년 새 소비에트 연방(USSR, 1922-1990)에서, 한인 신청자 6000명 중 1300명 정도만이 시민권을 받았다. 이듬 해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1920년부터 두 해만 존재했던 소비에트 위성국이었지만, 한인들은 극동공화국이라는 ‘자치공화국’을 경험했다. 1928년부터는 비로비잔(Birobidzhan)에 유대인 자치지역이 생기는 것을 봤다. 한인들 사이에서도 자연히 ‘한인 자치지역’(ASSR,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을 소비에트 당국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연해주에 사는 러시아인들도 반대했다. 1929년 소비에트 당국은 한인 자치지역 설립 건을 거부했다. 소련 내에서 철권 일인 독재를 시작한 스탈린이 자치지역을 만들어 줄 리 없었고, 민감한 연해주에 한인 자치지역을 만들어 일본과 대치할 이유도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등장한 공포스런 낱말은 ‘적’이었다. ‘인민의 적’(브라그 나로다)이 되면,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처형됐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아니면 시민권이 박탈되고 집단 노동수용소로 가야 했다. 이보다 덜한 형벌은 사람이 드문 지역으로 가서 강제로 정착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화살을 혁명 동지들과 소수 민족으로 옮겼다. 혁명 동지들과 소수 민족들은, 스탈린 통치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집단으로 간주되어 ‘인민의 적’이 되어 버렸다. 혁명 동지들은 숙청됐고 소수 민족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다. 1930년대 후반 10여 개 민족이 ‘인민의 적’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는데, 첫 희생자가 연해주 한인들이었다.

 한인 인구가 증가하고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문화활동이 활발해지자, 처음에 소비에트 정부는 한인들의 역할을 축소하려고 했다. 1926년 12월 6일, 연해주 한인들의 절반을 하바롭스크 북쪽으로 비밀리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30년에 2500명만 이주시키고 다음 해 이 계획은 철회됐다.

끝난 것이 아니다.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마침내 모든 한인들의 이주를 결정했다. ‘1428-326CC’라는 명령서다.

 명령의 목적은 일본 간첩이 극동 지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다. 간첩은 ‘인민의 적’ 중에서도 ‘인민의 적’이다.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1. 모든 한인은 극동의 국경 지역에서, 카작스탄 남쪽, 아랄해(Aral) 지역,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추방한다.

2. 추방은 즉시 시작하며 1938년 1월 1일까지 끝낸다.

3. 가져갈 수 있는 가축은 가져가도록 허용한다.

4. 동산과 부동산 및 농작물은 보상한다.
5. 군 병력을 3천명 늘려 정착지의 안전을 확보한다.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 겐리히 류쉬코프(Genrikh Samoilovish Lyushkov, 1900-1945)가 연해주 비밀경찰(NKVD, 내무인민위원회) 책임자로 왔다. 강제이주 집행 전인 1937년 7월 31일이다.

한인들이 가축을 어떻게 가져가며, 보상을 어찌 받을 수 있었겠는가? 강제 이주에 앞서 한인 지도자들의 소름 끼치는 학살이 있을 뿐이었다. 2500명 가량이 비밀경찰에 처형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예조프시치나’(Yezhovshchina)라는 낱말이 있다. ‘대숙청’이라는 뜻인데, ‘예조프’(Nikolai Ivanovich Yezhov, 1895-1940)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예조프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수장이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충성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했다. 그래서 대숙청을 ‘예조프시치나’라고 부른다.

그가 비밀경찰 책임자로 있던 두 해 동안, 130만 명이 체포돼 68만 명 이상이 처형됐다. 고위급 공산당원들과 군대 고급 장교들 절반 이상이 처형됐다. 나머지는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강제수용소에서도 14만 명 이상이 죽었다.

그가 스탈린에게 바치는 충성은 별났다. 비밀경찰 전임자인 야고다(Yagoda)를 반역죄로 고문하고 죽였는데, 그는 굴라그(강제 노동수용소)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예조프는 비밀경찰 요원들뿐만 아니라 미리 할당한 수를 채워 무고한 사람들까지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는 말했다. “스파이(인민의 적) 1명 도망가는 것보다, 무고한 사람 10명 어려움 당하는 것이 낫다. 나무를 베면 부스러기가 튄다.” 나무를 베면 부스러기가 튄다(Лес Рубят, Щепки Летят.)는 말은 러시아 속담으로, ‘큰 일을 하는데 작은 허물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 죽이는 것이 부스러기 튀는 것밖에 안 되던 시절이었다.

1937년 10월 25일 예조프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연해주 한인 총 36,442가구 171,781명 이주를 마쳤음. 총 124편의 열차로 카작스탄 공화국에 20,170가구 95,256명,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 16,272가구 76,525명을 배치했음. 극동 캄차카 및 오호츠크 지역에 남은 한인 700명은 11월 1일부터 열차로 이주시킬 것임. 11월에 이주와 배치를 완료할 것임.

한인 강제 이주 책임자 예조프는 그 해 12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내무인민위원회(NKVD) 2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그가 주인공 행세하는 것을 스탈린이 봤다. 그는 이 년 후 모스크바 근교에서 비밀리에 처형됐다.

연해주에 비밀경찰 책임자로 와서 한인 지도자들을 죽였던 류쉬코프는 어떻게 됐을까? 그도 1945년에 사라졌다. 그 시절은 그랬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