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걷기도를 다녀왔다. 일정 중에 잠시 비 오는 날도 있었지만 예년과 달리 한파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행사를 마치고 오후에 떠났지만 거리에서 성탄분위기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은 한해의 끝을 향해 부지런히 내닫고 있었다. 작년 이 맘 때 걷기도를 마치고 포항터미널에서 올라온 기억이 엊그제 같다. 일 년의 간격이 점점 빠르다.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올해는 아예 계획을 바꾸어 우리 집에서부터 걷기로 하였다. 예정대로라면 포항에서 울산으로 가는 길이어야 했지만, 몇 달 전부터 무릎이 불편해져 몸 상태를 고려해야 하였다. 이런 저런 생각에 이르자 전국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기도 하였다. 지금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다. 2007년 걷기도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무릎 스타킹 같은 보호대를 착용하였다.
의사 말로는 나이 탓이라고 하니,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일정을 3박 4일로 여유 있게 늘리고 목적지도 바꾸었다. 의왕에서 이천 국립호국원까지 약 70여 킬로미터 거리다. 호국원을 선택한 이유는 부모님을 모두 그곳에 모셨기 때문이다. 일정을 변경하면서 여러 가지가 바뀐 셈이다. 강함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해도, 연약함이 나를 변하게 한다. 약해진 무릎 때문에 조심한 탓일까, 걷기도가 더 평화로웠다.
이런 이유로 걷기도는 부모님과 동행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천 호국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만난 낯익은 지명들도 반가웠다. ‘용인, 덕평, 원삼, 양지, 백암, 이천.’ 부모님의 고향부근 동네들이서 어려서부터 귀에 익은 이름이다. 어머니는 용인 사람, 아버지는 이천 사람인데 두 분이 자란 곳은 두 군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어 십리 거리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외갓집에 가면 아버지 외삼촌댁까지 들러 오곤 했다.
꼭 4년 전 오늘(1.19)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점심을 드시고 주저앉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 시간 반도 채 못 되어 서둘러 떠나셨다. 전날 자동차운전까지 하신 분이니 평소에 아주 건강하셨다. 방학을 맞아 내려 온 막내딸이 준비한 점심을 어머니와 함께 기분 좋게 드시고 아무런 고통 없이 작별하셨다. 두고두고 아주 깨끗하게 임종하셨다는 말을 들으며 위로로 삼았다.
누구나 이렇게 죽기를 소원한다지만 막상 닥치니 자식의 입장에서 참 서운하고 섭섭하였다. 평소 말씀이 적은 분이었고, 괜한 말로 자식에게 조차 폐를 끼치기 싫어하셨다. 하루 전 날 터키로 떠났다가 황망히 귀국한 큰 형은 “아버지는 유언이 필요 없는 분이다. 몸으로 보여주셨다”는 말로 형제를 다독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늘 그리워하다가 꼭 3년 만에 동행 길에 오르셨다. 평생 64년을 함께 사셨으니 그 그늘이 얼마나 컸을까.
꽤 오래 전에 ‘영월 덕포에서 평창 대화까지’ 걸은 적이 있다. 1971년 겨울, 겨우 42세이던 아버지는 가솔을 이끌고 듣도 보도 못한 강원도 산골 대화라는 곳까지 이주를 결행하였다. 아내와 사남매를 데리고 새로운 일터를 찾아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더 사셨다. 그 날 아버지와 함께 대한통운 트럭 앞자리에 앉아 까마득한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며 멀미를 하였다. 그때 이사하던 기억을 더듬어 걸으면서 중년의 가장이 진 어깨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였다. 무엇이든 척척 해 내시던 아버지에게도 쉽지 않은 인생길이었을 것이다.
대화에서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자마자 부모님은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셨다. 덕분에 작은 형의 뒤를 이어 아직 초등학교도 마치기 전에 서울 은로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1973년 10월이었다. 전학수속을 마친 아버지는 교실 창문을 두드리며 내게 작별을 손짓하였는데, 수업을 마치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던 순간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골대를 붙잡고 서럽게 울던 추억이 새롭다. 이젠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먹은 나이만큼 둔해진 까닭이다.
아버지의 빈소에 조문 온 교우 한 분에게 들은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자신은 중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 그늘 아래 살았다는 것이 너무 부럽다고 하였다. 돌아보면 나는 평생 ‘아버지 프리미엄’을 넉넉히 누리며 살았다. 게다가 어머니 사랑까지, 그 은혜는 더 말할 나위없다.
어쩌면 해마다 반복하는 걷기도는 일종의 순례자 흉내이다. 순례자로 번역한 라틴어 어원(‘페레그리니’)은 타향인, 낯선 사람을 의미한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계로 여행하며 불편을 겪을 수 있는 위험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어감으로써 자신만의 길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인생의 순례자이고, 낯선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마침내 열세 번째 걷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였다. 60대 진입을 며칠 앞두고 잠시 내 앞을 가로 막았던 두려움과 주저함을 잘 극복한 셈이다. 페인트너가 쓴 <영혼의 순례>에는 순례여정을 위한 8가지 규칙이 나오는데, 그 여덟 번째가 ‘집으로 돌아오는 훈련’이다.
“그리고 순례의 여정은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가 몸으로 순례를 떠나지 않고 깊은 내면의 여정으로 순례를 떠났다고 해도 우리 본향이 우리 내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고 친숙한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삶의 순례가 어디 몸의 이동뿐이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겪는 이별은 몸의 ‘별리’(別離)뿐 아니라 수없이 반복하는 마음의 ‘정리’(定離)도 있을 것이다. 모처럼 별렀던 만큼 부모님과 만남을 통해 다가 올 인생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마 그런 부모님 프리미엄은 내 영혼의 DNA가 이어지는 한 내 자녀와 그 자녀의 자녀에게까지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심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고향을 찾게 하심이라”(힐데가르트 폰 빙엔).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