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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형님’과 ‘오 예스’

기사승인 2020.02.14  21: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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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은 저의 쉬는 날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한국 시간으로 그 날 오전에 열려서 생방송을 통해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때는 2003년 가을이었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큰 이슈가 되었을 때 인문대 어디선가 봉 감독을 초청했었습니다. 아직은 크게 유명해지기 전이라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 틈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음대생은 저 혼자였습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해서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올 해 거둔 아카데미의 업적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첫 작품 ‘플란더스의 개’부터 봉감독과 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팬으로서 작금의 대중적 인기에 모종의 질투심을 느끼고 있지요. 제가 봉감독에 대해서 감탄하는 이유는 무명의 설움과 생활고를 갓 벗어난 17년 전 서른세 살 봉준호와 지금 세계적 명성을 얻고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봉준호의 모습이 살이 찐 것 외에는 전혀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렁설렁함 속에 숨어 있는 번뜩이는 눈빛 그리고 영화에 대한 재미 가득한 열정과 그 열정의 삶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이러기가 쉽지 않지요. 하지만 그 시절 봉 감독은 뭔가 달라도 달랐습니다. 임권택의 장인적 면모나 은근 퇴폐미를 추구하는 박찬욱,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쓰고 싶은 이창동의 모습은 없었지만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진지한’ 느낌을 주지만 봉감독은 그저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에겐 거만함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겸손도 없었습니다. 그저 영화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음악에서의 모차르트처럼 말입니다.
     
목회자들의 세계에서도 부목이나 작은 목회지에 있을 때는 사람 눈치를 보고 사람을 의지하며 살다가 정작 그런 처세술로 얻은 큰 목회지에서는 제왕적인 모습으로 돌변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봉준호 감독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매 순간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삶과 신앙생활을 만끽하는 것이 영적인 대가가 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자잘한 일상을 소중히 여겨 기억하고 그 일상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디테일의 장인’ 봉준호와 그의 영화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발휘되는 디테일의 힘은 결코 영화적인 트릭이 아닙니다. 디테일에 대한 관심은 삶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내는 그의 일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뤄야 할 목표나 당면한 문제점에 집중하느라 일상의 소중한 편린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봉준호 감독은 일상을 소중하게 다루며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평범한 것들을 섬세하게 관찰하였고 그러한 삶의 자세가 지금의 그와 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봉감독 뿐만 아니라 그의 통역사인 샤론 최가 매우 민첩하고 재치 있는 통역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놓친 매우 중요한 한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형님’이라는 우리말입니다. 봉감독은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저의 영화를 아직 미국의 관객들이나 사람들이 모를 때 항상 제 영화를 리스트에 뽑고 좋아했던 쿠엔틴 형님이 계신데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는데 통역은 여기에서 ‘형님’이라는 단어를 빼 버렸습니다. 개인적 친근감과 존경심이 함께 담긴 우리말 ‘형님’이라는 ‘높임 형 애칭’을 영어로는 번역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brother'라고 하기에는 너무 경박하고 ’boss'라고 하기에도 어감이 좀 좋지 않습니다. 이 둘을 합한 ‘bross'라는 말이 영어에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형님’은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과 존경과 친근함을 모두 담은 호칭인 것이지요. 두 언어 사이의 한계라고 할 수 있고 오히려 섣불리 번역하려 들지 않은 것이 그녀의 실력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찬송가 중에서도 번역의 한계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간혹 있습니다. 다만 영어 가사의 느낌을 우리말로 온전히 옮길 수 없는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지요. 찬송가 372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는 ‘아프로-아메리칸 영가(Afro-American Spiritual)’입니다. 예전엔 ‘흑인영가’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인종차별적인 용어가 되어 사용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찬송가는 샤론 최의 통역처럼 아주 모범적인 번역입니다. 다만 두 언어의 사이의 한계와 찬송가의 음표에 맞춰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쉬울 뿐이지요. 아무튼 이 찬송가의 1절 중간 부분에는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Sometimes I'm up, sometimes I'm down, Oh, yes, Lord!"입니다. 우리말로는 넘어지는 것(down)만 표현되지만 영어에서는 업(up)되는 것 또한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힘들어 쓰러지는 것만큼이나 인간적으로 ‘업’되어 있는 상태도 우리의 심각한 영적 문제입니다. 그 정도는 어쩔 수 없고 어느 정도 뜻이 통하고 있기에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 놓치기 아쉬운 영어표현은 ‘Oh, yes, Lord!’입니다. 우리말로 ’오 주여!‘라고 번역되었는데 음표가 세 개 밖에 되지 않기에 마땅한 대안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yes’라는 표현을 우리말 가사에 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 ‘yes’라는 한 단어에 아프로-아메리칸의 영성이 깊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굳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맞습니니다 주님, 그래요,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내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렵니다.’라는 의미가 그 ‘yes’한 단어에 스미어 있습니다. 우리말 가사에서는 절망적인 상황만 느껴지지만 영어 가사에서는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함께 느낄 수 있지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로 이 곡을 들어보시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를 초월해서 소통하기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날린 봉감독의 한 마디 말이 저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어는 영화입니다.” 어쩌면 이 한마디 말이 견고한 아메리카니즘에 둘러싸인 아카데미와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감독이 존경하는 감독이나 작품에게 보내는 가장 큰 경의는 ‘오마쥬’입니다. 저도 봉감독께 경의를 표하는 맘으로 한 마디 남기렵니다.

“우리는 민족마다 다른 언어로 찬양하지만 단 하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음악듣기 : 루이 암스트롱의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https://youtu.be/SVKKRzemX_w

        
 

조진호 jino-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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