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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목자를 업신여긴 양떼의 비극” 스가랴 11장12절~17절

기사승인 2021.09.05  23:27:03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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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목자를 업신여긴 양떼의 비극” 스가랴 11장12절~17절

 

 

1. 자리정리 – 심판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본심

 

▶ 스가랴11장은 다소 난해한 말씀이다. 본래적인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선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전이해와 함께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잡힐 양떼’를 구원하시기 위해 선한목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셨다(4절). 또한 ‘은총과 연락의 막대기로 양떼를 이끄셨다(7절). 불행하게도 목양의 결과는 성공이 아닌 실패였다. 선한목자의 목양이 실패한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목자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 곧 양떼들의 완악함과 완고함으로 인한 구제불능이었다. 이스라엘나라의 멸망과 성전파괴의 원인은 목자가 양떼를 버린 게 아니라 양떼가 목자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버리신 게 아니고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저버리고 자멸한 자업자득이다.

▶ 결국 하나님께서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다. ‘죽는 대로, 망할 대로,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9절). 가장 무서운 형벌은 멋대로 내버려 둠이다. (롬1:21~24)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내버려둔 까닭은 방치나 방관이 아니다. 방종과 방탕의 끝을 직접 경험하게 하시는 체험학습이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다.

▶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10절)” 하나님의 처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위반에 따른 언약의 파기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약의 갱신이다. 양떼를 죽이려는 게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시기 위한 극약처방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양떼들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심판과 징계는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다. 이것이 ‘심판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본심’이다. 고난은 크게 둘로 분류된다. 하나는 ‘의를 위한 핍박’이고 다른 하나는 ‘죄로 인한 징계’다. 의를 위한 핍박은 믿음으로 인내해야 하지만 죄로 인한 징계는 속히 회개해야 한다. 진단이 정확해야 올바른 처방이 가능하다. 전대미문의 재난과 한국교회의 위기는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니라 죄로 인한 징계다. 지금은 인내가 아니라 회개할 때다.

 

 

2. 목자를 업신여긴 양떼의 숙명

 

① (12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 목자가 양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곧 언약이 파기된 원인을 추가적으로 증거 한다. (메시지성경) “내가 그들에게 내게 적절한 삯을 알아서 쳐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은 삼십 개를 내게 주었는데 모욕적일 만큼 적은 액수였다” 은 삼십 세겔은 구약 시대에 종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하는 적은 푼돈을 가리킨다. 결론부터 말하면 양떼가 목자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업신여기고 멸시했기 때문이다. 목자를 업신여긴 이유는 목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멸시했기 때문이다. 마치 사울 왕이 사무엘의 말에 청종하지 않고 불순종했던 이유가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멸시했던 것과 같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왕상15:24)”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불순종하는 진짜 이유는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② (13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삽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 (메시지성경)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 돈을 자선 헌금함 속에 던져 넣어라 내가 한 일에 대해 그들이 쳐준 값이 고작 그 정도였다! 나는 은 삼십 개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자선 헌금함 속에 던져 넣었다” ‘준가(準價, the full price)’는 상응하는 가격, 충분한 대가, 보배롭고 고귀한 가치라는 뜻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목자의 헌신을 헐값의 값싼 은혜로 하찮게 여겼다는 말이다.

▶ 스가랴의 이 예언은 은 삼십 냥에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유명하다. (마27:3~10)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예레미야와 스가랴의 예언대로 가롯 유다는 선한목자로 오신 존귀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헐값에 팔아넘겼다. 이는 가롯 유다 뿐 아니라 모든 양떼가 세상을 구원하실 선한목자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게 죄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처럼 은혜의 가치에 무지하고 진리의 진가를 모른 채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비참한 결과다.

 

③ (14절)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 둘째 막대기인 ‘연락’은 영어로 컨택트(contact, 접촉)다. 지금 언택트(Untact, 비접촉)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목자가 막대기를 잘랐지만 목자가 양떼를 버린 것이 아니라 양떼가 목자의 가치를 몰라서 저버린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교통하는 소중함, 예배의 소중함, 단절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이키는 기회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는 말은 스스로 건강하다 여기는 사람은 의원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병듦을 인정할 때 비로소 치료가 시작된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기면 씻지 않는다. 더러움을 인식할 때 깨끗해진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때 배움이 시작되듯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새롭게 될 수 있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되는 까닭이다. 가롯유다의 때 늦은 후회를 거울삼아 너무 늦기 전에,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을 때 빨리 회개하는 게 지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 않으신다. 구원이 문이 닫히면 들어갈 수 없다.

 

 

3.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① (15절~16절 상)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 은총을 저버리고 연락을 멸시한 양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처분이다.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한 목자는 우매한 목자다. 선한목자를 보내서 깨닫지 못하면 우매한 목자를 보내신다. (출7:3)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 바로는 악역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우매한 목자의 특징은 목양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로 대적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을 나타내게 하신다.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선한목자가 은총과 연락의 막대기로 인도할 때 깨닫지 못하면 악한목자를 세워 고난과 징계의 막대기를 통해서라도 깨닫게 하신다. (삼하7:14)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회초리였듯 코로나 팬데믹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하던 인류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회초리다.

 

② (16절 하)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 우매한 목자의 악행이다. 선한 목자가 떠나면 악한 목자가 다스린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면 정의와 진리, 사랑과 평화가 다스리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면 다른 것이 왕 노릇하고 악한목자가 다스린다. 바로 왕을 섬기면 평생 벽돌을 빚어 피라미드를 쌓는 바로의 노예로 살듯 물질을 섬기면 물질이 다스린다. 부동산을 섬기면 부동산의 노예로 살고 성공과 명예를 섬기면 성공과 명예의 노예로 산다. 시간과 재능, 물질과 에너지로 무엇을 섬기고 무엇에 이끌려 사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통찰대로 ‘어둠은 빛의 부재(不在)다!’ 어둠의 실상은 빛이 없는 상태다. 빛이 오면 어둠은 사라진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다스린다. 불평은 감사 없음이다. 감사하면 불평은 사라진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평이 다스린다. 염려는 기도 없음이다. 기도하면 염려는 사라진다. 기도하지 않으면 염려로 가득 찬다. 두려움은 믿음 없음이다. 믿음이 있으면 담대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사도바울의 통찰대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③ (17절)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구원뿐만 아니라 저주와 심판도 내리신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축복과 구원, 저주와 심판의 목적은 동일하다. 회개다. 깨닫고 돌아오길 원하신다. 그래서 때리시고 징계하시지만 돌이켜 회개할 때 어루만져 주시고 다시 회복시키신다. 지금은 우리는 악하고 우매한 목자가 다스리는 때를 살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와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과 공포, 염려와 불평 속에 산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회복의 길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다. 다른 길은 없다! 우리가 전심으로 회개할 때 선한목자 되신 주님께서 악하고 우매한 목자,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를 마침내 몰아내실 것을 선포하신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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