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사이로 오시는 하나님
(<질문의 시간: 40일을 그와 함께>, 김헌, 북루덴스, 2021)
“그의 신비로운 힘에 취해있던 제자들은 그에게 고통과 좌절, 참혹한 모욕과 죽음의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 그는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처절하고 철저하게 고독했다.”(182-189)
어느 대중가요에 “빈 틈 없이 행복해”라는 노랫말이 있다. 행복을 희구하는 이들은 이 시적인 표현에 열광한다. 당신이라는 존재 덕분에 경험하는 행복이, 슬픔이나 괴로움 등을 상쇄해낸다는 고백일 터. 촘촘하게 어떤 메시지로 꽉 찬 작품보다는 여백이 있는 것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을 때가 있다. 삶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다름을 포용할 수 있는 여유, 타인이 숨 쉴 수 있는 여백, 이런 빈 공간이 좋다. ‘텅 빈 충만’이란 형용모순의 표현도 비슷한 결을 지녔을 것이다.
학술논문들을 읽다가, 이 학자는 상상력이 대단한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단순히 나열된 이야기들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행간 사이의 여백을 들여다보는 것이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칠 필요가 있다. 객관적 근거가 첨부되고, 그 논거가 다른 이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상상도 유효하고 유익하다. 한국교회 강단은 다소 경직된 부분이 많은 듯싶고, 이 일련의 연유들로 비성직자, 소설가나 인문학자의 성경해석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자신의 탄생이 그날 베들레헴의 죄 없는 수많은 어린 생명의 피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 광야로 나가 40일을 헤매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탄생과 존재 이유를 스스로에게도 묻고 신에게도 물었을지도 모른다. 악마가 세상의 권력을 제안하며 유혹했을 때는 몸서리를 쳤을지도 모른다.”(76-7)
김헌의 <질문의 시간>은 사순절 기간 동안에 묵상한 글들을 엮어 만든 책이다. 서양고전학을 전공한 만큼, 그의 독법은 정교했고 탁월했다. 신화적 이야기를 다루는 전문가의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런 이야기 변주가 가능하다면, 신앙인들의 삶은 보다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또한, 자아 성찰적 요소가 짙었다. 잠시 교회공동체를 떠나기도 했다는 후술도 있는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위해 결단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사순절의 첫 꼭지는 마귀의 시험이다. 탐욕에 대한 고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흥미로웠다. “빵을 만나처럼 베푼 신이 빵을 얻고 먹는 방식에 관해 말한 규칙에 따라야 인간적 품격을 지키며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38) “악에 무릎 꿇고 쥐게 될 권력으로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구원과 해방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44)
예수의 하나님 나라, 그것이 지어낸 것인지, 아니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지는 그 이야기 앞에 서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146) 관념적으로 믿는 것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들을 결단해야 한다는 의미다. 신앙은 골방이 아니라 광장에서 드러내야 함은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일치, 그것은 정통교리orthodoxy가 아니라 정통행동orthopraxy으로 가능하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살게 된다. 말과 이야기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세계를 제공하고 사람들을 그 세계 안에 묶어주는 연대의 힘이 있다.”(153)
예수가 체포된 직후, 마가복음에 불순물 같은 구절이 하나 끼어 있다. 한 청년이 알몸으로 줄행랑을 쳤다는 기사가 그것이다.(막14:51) 예수께서 얼마나 고독했는지를 깨닫게 도와주는 구절이다. 사순절,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는 예수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일이다. 비워낼 때 충만해지는 역설을 많이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를 믿는다는 것. 사랑과 정의, 진리의 가치를 지키며 사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 세속적 부와 권력, 명예 같은 것에 대한 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그런 삶이 더 아름답고 가치 있으며 살 만한 삶임을 믿는 것. 설령 그의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살다가 부당하게 손해를 입고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고 핍박과 고통에 시달리더라도 그런 삶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렇게 살다가 짓밟혀도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듯이 사랑과 정의, 진리의 가치를 지키는 삶은 죽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굳세게 되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것. 그의 탄생과 시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와 의미를 믿는 것이 종교적 상징과 존재론을 믿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닐까?”(206-7)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
김민호 지음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