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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네 형제들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동현 번역, 사단법인 올재, 2024)
“유학 가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갔다 온 뒤로는 무엇을 할지 계획은 있니?”
“특별한 계획 없는데요?”
독일에 가서 신학을 더 공부하기로 결심한 뒤로 위와 같은 대화를 참 많이 했다. 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거 참 대책 없는 놈이로군’,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친구군’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무계획도 계획이라고 생각한다.”,,,는 아니고, 사실 독일 유학을 결정한 뒤부터 내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무엇’이 되기 위해서 공부할지, 갔다 와서 ‘무엇’이 될지가 아니었다.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였다. 왜냐하면 신학을 공부할수록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과 내가 근원적인 관계를 맺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 근원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근래 내 대답 속에는 ‘현재 나는 어떻게 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지, 현실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무엇이 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라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신학생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를 거꾸로 말한다면 ‘나는 아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내 모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제자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체포되기 이전의 제자들의 모습과 같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일들을 보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자신을 추동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느끼지만, 정작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 이게 바로 지금까지의 ‘나’였다. 나는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모습들만 보며 따라갈 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나 죽음, 부활은 경험하지 못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니 점점 더 답답해졌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데 도대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얼마 전 불현듯 도스토옙스키가 쓴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파트가 생각났다. 왠지 그곳에 답이 있을 것만 같아 오랜만에 다시 <대심문관>을 읽어보았다.
<대심문관>은 소설 속 카라마조프가의 둘째인 ‘이반’이 동생인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서사시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스토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종교재판이 성행하던 시대에 스페인의 세비야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난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살그머니 나타났으나 모두 그가 그리스도임을 알아차린다. 사람들은 즉시 예수님 주변에 모여 예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본 대심문관이 호위병들에게 예수님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사람들은 대심문관의 강력한 권세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호위병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예수님은 체포당한다.
대심문관은 체포당한 예수님을 향해 당신이 진짜 예수건 가짜 예수건 상관 없이 당신을 가장 악질적인 이교도로서 화형에 처해 버린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예수님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려고 했지만, 인간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 복종을 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를 지배하지 않고 더 큰 자유를 주려 한 예수님은 잘못했다, 오히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에 응해야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을 버리고 ‘악마’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제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린다. 대심문관은 아무리 무섭고 뼈아픈 말이라도 좋으니 뭐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침묵한다. 그리다 예수님은 갑자기 대심문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예수님이 입을 맞추자 대심문관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예수님을 풀어준다.
<대심문관>에서 대심문관에게 입맞춤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면 언제나 ‘예수님은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비난하고 힐난해도 책망하지 않으시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동안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대심문관> 이야기가 끝난 뒤에 나오는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 노인은 어떻게 됐죠?”
“그때의 그 키스는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기의 이념을 고수하고 있었지.” (460)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는데도 여전히 자기의 이념을 고수했다니! 나는 지금까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런 내게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도, 그래서 가슴 속에 뜨거운 불길이 생겨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대심문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심문관 말고 또 있었다. 바로 대심문관이 오기 전에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가 행하는 기적을 확실히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심문관이라는 권력자가 예수님을 체포한다고 하자 그 권력이 무서워 곧바로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대심문관>을 읽고 난 뒤 ‘어떻게 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더 크고 무거운 질문으로 바뀌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너는 세상의 권력과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고 그를 따를 수 있는가?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두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순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해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들이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결단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나는, 또 우리는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고난주간을 지내고 있으며 부활절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우리 모두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다.
김윤형 (청년)
김윤형 청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