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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를 죽인 사람

기사승인 2017.12.09  0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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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질 필요가 없는 남의 아기에 대해서는 그 덕담이 더욱 풍성하고 후해집니다. 대통령감, 장군감, 재벌감, 박사감, 법관감 아닌 아기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믿는 이조차도, 아기가 장차 예수님을 닮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남의 아기를 보고 너 앞으로 예수님처럼 살아라, 하면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남의 아기는 몰라도 내 아기만은 예수님처럼 살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아기 예수의 천진성이 꽃피기 전에 잘라버리려고 작심을 합니다. 얻어맞는 아이가 될까 봐 먼저 때리길 부추기고, 행여 말석에 앉는 아이가 될까 봐 양보보다는 쟁취를 가르치고, 박해받는 이들 편에 설까 봐 남을 박해하는 걸 용기라고 말해주고, 옳은 일을 위해 고뇌하게 될까 봐 이익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돌진하기를 응원합니다.

모든 아기들은 태어날 때 아기 예수를 닮게 태어났건만 예수님을 닮은 어른은 참으로 드뭅니다. 있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용의주도하게 죽였으니까요.”

이 글은 우리말을 참 아름답게 다루는 작가 박완서가 <우리 안에 공존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라는 제목으로 쓴 글의 일부다. 작가는 신생아실의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묘사하면서 아이들을 향한 덕담으로 주제를 이끈다. “그들처럼 되어라.” 성공을 상징하는 모든 직업군들이 덕담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덕담의 대상이 되지 못 한다. “예수님처럼 살아라.”라는 말이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 된다는 아이러니, 작가는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삶을 살기는 꺼려하는 우리 모두를 잔잔한 언어로 통렬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는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자녀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죽였다고 서늘하게 말한다. 그것도 용의주도하게.

작가의 말처럼 우리 안에는 꺼질 것 같은 아기 구세주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잔인한 왕의 명령을 무시했던 동방의 박사들보다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헤롯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기 예수를 기리고 기다리는 절기 속에서 스스로를 동방박사로 생각하고 싶은 우리가 사실은 헤롯에 가까운 마음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니, 이 얼마나 서늘하고 무서운 진실인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만 싶을 뿐 그 삶을 따라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정은 다르지 않다. 구세주의 탄생을 고대하며 삶의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아기 예수를 찾고 경배하며 기뻐했던 동방박사들과,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자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해쳐서라도 구세주를 처치하려 했던 헤롯 중에서,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바로 그 헤롯처럼 지금도 나는 내 안에 계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삶을 살기 무섭고 싫어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속이며, 태초의 가인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마음속의 살인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가장 먼저 돌이켜봐야 할 회개의 마음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마 2:16)

이진경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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