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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벌어지는 코믹 쇼

기사승인 2019.01.19  01: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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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통적으로 큰 아들이 가정의 제사를 책임지고 나이 든 부모를 부양해 왔다. 그래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나이가 들면 자식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식에게 의탁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노인들이 많다. 상속법에서도 자식들에 대한 상속은 딸들까지 포함해서 N분의 1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논농사를 지을 때 손으로 모를 심고 호미로 김을 맸다. 초벌과 재벌 김매기는 호미로 했지만, 세 번째는 손으로 논바닥을 고르면서 풀을 뽑았다. 만두레라고 부르는 세 번째 김매기는 중복 전후에 했는데, 그 더운 때 다 자란 모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김매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손으로 모를 심는 사람도 김을 매는 사람도 찾아 볼 수 없다. 벼를 거둘 때에도 옛날처럼 낫으로 벼를 베는 사람은 없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는 그것이 실제로 좋거나 합당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내가 옛날 것을 고집하는 것은 내 신념이니까 너희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옛날 방식에 집착한다면, 그는 괴짜로 간주될 것이다. 어느 누가 지금 소달구지를 끌고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옛날의 삶에 매어서 무턱대고 새로운 것을 외면하면 코믹 쇼의 주인공이 된다.

그런데 교회에는 급속히 변하는 세상을 외면하고 옛것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의 관습도 변하고 사회 제도도 변한다. 그렇게 바뀌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들은 새로운 것은 왜 도입되었는지, 그 장점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내가 배운 것과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고 나선다.

그들은 세상 지식은 신앙을 해친다고 믿고 새로운 세상 지식과는 담을 쌓고 산다. 그들은 지구의 역사가 46억년이라는 지질학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지구의 나이는 6천년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구의 역사가 6천년이라고 가르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46억년이라고 배운 것을 기억하면서 쓴 웃음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그 웃음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코믹 쇼에 대한 반응이다.

근본주의자들의 말대로 현대과학은 믿을 것이 못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르치는 창조과학을 믿어야 한다면, 교인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목사도 장로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낸다. 무리를 해가면서 유학을 보내기도 한다. 이것도 코믹한 상황이다.

기독교 신학의 초석을 놓은 바울은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에 정통했고 중세신학의 중심에 서 있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좋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고 말했고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믿음과 앎을 모두 중시한 사람들이다.

과거에 매어서 현대 학문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다. 그들은 세상 지식은 물론 20세기 이후의 성경연구의 결과도 외면한다. 축자영감설을 고집하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이 전혀 가미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기록자를 밝히는 고등비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왜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지, 왜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네 복음서에 각기 다른 기록이 나오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7장 53절에 “어떤 사본에, 7:53부터 8:11까지 없음”이라고 주를 달았다. 이 주에 따르면 두 가지 성경사본이 있고 개역개정판을 번역한 사람은 그 중에서 하나를 택했단다. 그런데 축자영감설로는 어떻게 해서 두 가지 사본이 생겼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번역자가 어느 사본이 적절한 것인지 판단하는 데 따라서 성경이 달리 번역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판단에 따라서 번역 성경의 내용이 결정된다. 축자영감설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고등비평이다.

독자가 처한 사회·문화적 상황이 바뀌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옛날 사람들은 『심청전』을 읽으면서 심청의 효심에 탄복하고 용왕이 제물을 받는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생명을 바쳐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심청이의 효심에 마음껏 박수를 보낼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인간 제물을 용왕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수긍할 사람도 없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면 작품을 읽는 독자의 눈이 바뀌고 그 눈에 따라서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달라진다.

성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 이후로 지식의 확대, 인식의 전환, 전통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져 왔고, 그에 따라서 성경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불트만은 우주가 땅, 천국, 그리고 지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위 삼층 우주를 믿었던 시대에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이 천문학과 지질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본회퍼는 옛날에 우리의 인식 능력이 어린아이의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성인의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현대인은 성인답게 성경을 이해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있다. 교사가 자기의 수준에 맞추지 말고 학생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이야기해야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에는 교인들의 눈높이를 무시하고 그들을 옛날의 틀에 묶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학교에서는 교사의 눈이 학생들의 눈보다 높지만,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눈이 가르치는 사람의 것보다 높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천년 전으로 혹은 오백년 전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옛날 것을 현대로 끌어올려야 하지 않을까?

교회에서는 은하계와 우주의 팽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지구 중심설을 믿으라고 우격다짐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들은 트럭이 싫다면서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나 양복을 마다하고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외출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여러 교회에서 이런 코믹 쇼가 벌어지고 있다.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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