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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전 홀로도모르

기사승인 2019.07.17  22: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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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소련의 곡창지대였다. 여기서 1932년 ‘홀로도모르’(Holodomor)가 터졌다. 우크라이나어 홀로드(Golod)는 ‘굶주림’, 모르(Mor)는 ‘떼죽음’이라는 낱말이니 ‘대기근’이라는 뜻이다.

소련 시절에는 입에 올릴 수 없었던 홀로도모르 기록들이 2009년 기밀해제 됐다. 대기근으로 소련 전 지역에서 600만 명, 많게는 1000만 명이 굶어 죽었고, 절반 이상이 우크라이나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홀로드모르는 어떻게 발생했을까?

스탈린은 급진적 공업화와 집단 농장화로, 공산주의가 서방 국가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공업화를 이루려면 자본이 필요했다. 어디서 자본을 끌어올 것인가? 스탈린은 징발한 식량을 수출해서, 공업화에 필요한 설비와 자본재를 서방에서 구입하려 했다.

농업을 집단화 하면, 남은 인력은 도시와 공장에서 일할 산업예비군이 된다. 그런데 이들을 위한 식량 조달이 문제였다. 도시 공장 노동자들은 식량이 부족하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네프(New Economic Policy, 신경제정책, 1922-1928)를 버렸다. 그리고 식량 생산을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집단화를 추진했다. 통제를 극대화한 것이다.

1930년대에 스탈린은 농업 국유화를 강제 시행했다. 농업 국유화는 공업 국유화보다 훨씬 비참했다. 곡물 징발은 우크라이나와 같이 땅이 비옥한 지역에 집중됐다. 농민들이 집단 농장을 반대하며 강력하게 반발하자, 곡물을 내놓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고 협박했다. ‘내무인민위원회’(NKVD)은 반발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내무인민위원회는 숙청을 담당했던 정치경찰이다. 식량을 훔치면 최하 10년에서 사형까지, 식량 징발을 방해하는 농민은 죽임을 당했다.

소련에서 소비하는 식량의 4분의 1을 공급할 만큼, 우크라이나의 흑해 연안은 비옥한 토지였다. 그러니 집단화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농민들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집단 농장으로 넘기려 하지 않았다. 집단 농장의 생산은 느렸고 곡물 생산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반발이 거세자 스탈린은 ‘쿨라크’(Kulak, 부농)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쿨라크는 농지를 소유하고 소작인을 고용하던 부농을 가리킨다. 쿨라크가 곡물을 내놓지 않자 농장을 습격해 약탈했다. 많은 쿨라크들이 내무인민위원회에 잡혀가 ‘굴락’(Gulag,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됐다. 굴락은 본래 노동수용소를 담당하던 정부기관의 이름이었는데, 강제노동수용소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쿨라크가 몰락하자 농업 생산량은 바닥을 쳤다. 그래도 곡물을 징발해 수출했다. 인민이 굶어 죽어가는 판인데도 어김 없이 한 해 180만 톤을 수출했다. 무기 구입과 공업화 자금 마련을 위해서다.

부농이 아닌 농민들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농장이 갑작스레 집단화 되자 문제가 속출했다. 사료도 부족했다. 농민들은 사보타주(동맹 태업)를 했다. 곡식을 수확하지 않고 가축을 도살했다. 말은 굶어 죽였다. “남에게 줄 바에는 잡아먹자.” “가축은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농민들은 가축이란 가축을 모두 도살했다. 그리고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가축이 부족하자 농지와 생산량이 급격히 줄었다. 1932년에는 가뭄으로 문제가 더 심각했다. 농업 생산 체계가 무너져 버렸으니 기근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농지를 버리고 탈출했다. 공산당은 군대를 보내 농민을 위협하고 철조망을 쳐서 탈출을 막았다. 홀로도모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여행과 보도를 금지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탈출했다. 루마니아 국경지대 드니스테르(Dnister) 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월경하다 많은 사람이 경비대에 발각되어 죽었다.

1933년은 더 심각했다. 우크라이나판 보릿고개 홀로도모르가 닥쳐 아사자가 속출했다. 집마다 거리마다 굶어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뼈만 남은 사람들은 풀을 뜯어먹었다. 당시 포스터 중에 “자기 아이를 먹는 것은 야만적 행위다.”라는 글도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인구 3000만 명 중 20퍼센트가 굶어 죽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스탈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던 이유는 우크라이나 역사에도 있다. 10세기부터 징기스칸의 침략 때까지 키예프 공국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중요한 유럽 국가였다. 17세기에는 폴란드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18세기에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서부 우크라이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배에서, 동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지배에서 각각 독립하고 1920년 통일을 선언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22년 서부는 폴란드, 동부는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다. 1930년대 우크라이나는 서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소련에 편입된 동부 대부분 지역을 뜻한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반러감정이 없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지금도 소련이 자신들을 의도적으로 굶겨 죽였다고 의심한다. 우크라이나는 홀로도모르를 ‘집단 학살’(Genocide)로 규정하도록 유엔에 계속해서 요청했으나 러시아의 반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예나 제나 우크라이나가 자신들 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기근 홀로도모르 이후가 이전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대기근 이후, 스탈린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됐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공화국들 가운데 특히 명령을 따르지 않은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붕괴시키려 했다. 스탈린은 대기근이라는 공포를 독재 체제 구축에 이용한 것이다.

기근의 피해는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카자흐스탄에도 집중됐다. 카작스탄은 광물이 많이 매장된 지역이다. 스탈린은 광물 자원을 집중 개발하고 농업을 집단 농장화 했다. 우크라이나와 같은 기근으로 카작스탄에서도, 362만 명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라졌다. 145만 명 이상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연해주 한인 18만-25만 명은, 카작스탄 당시 인구 수로 봐서도 적은 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936년 카작스탄은 소련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것은 카작스탄이 완전한 소비에트 체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 해 ‘농사를 잘 짓는’ 연해주 한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니, 이것 또한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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