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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마지막 33년: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SIDEWAYS, 2023)
참으로 괴이(怪異)한 시절(時節)을 살아간다. 정치군인 전두환의 비상계엄 선포(1980)로 촉발된 광주민주화운동, 그 참혹한 역사를 박제(剝製)하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으며 작품을 써온 한 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온 국민이 다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고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감격스런 시상식을 준비하고 있던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에 명색이 대통령이라는 윤석열이 뜬금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모든 법률적 절차도 생략하고 비상계엄의 요건도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말로 황당한 짓거리를 벌인 것이다. 계엄선포와 동시에 국회를 경찰이 에워싸고 중무장한 특수전 병력이 국회에 난입하였으나 한밤중에 여의도로 달려 나간 민주시민들과 야당 국회의원들의 발 빠른 대처로 윤석열의 내란 시도는 6시간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당과 일부 수구세력의 저항으로 정국은 몹시 불안정하고 국격은 하염없이 추락하고 국가 경제는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하고 있으며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은 연말 특수조차 물 건너가 줄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사람 하나를 잘못 뽑은 대가를 온 나라가 이토록 혹독하게 치루고 있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인종청소 공장이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돌판에 기록된 문구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결과 박정희의 손에 자란 괴물 전두환이 나타나 수많은 민주시민을 짓밟고 제 맘대로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의 나이 50살 때다. 우선, 오래 기억하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그 숫자라도 기록해 둔다: 사망 163명, 행방불명 166명, 부상 3,139명, 부상 후 사망 101명, 구속과 구금 1,589명, 무연고 희생자 5명, 총 5,189명. 아울러 삼청교육대 희생자도 기록해 둔다: 검거 60,755명, 삼청교육대 훈련 40,347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 339명, 부상으로 신체장애자가 된 사람 2,700명. 총 10,000명 이상… 이 무고한 피를 발판으로 전두환은 초헌법적인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였고 전두환의 공범인 노태우까지 그 바톤이 이어졌다. 올해 누적 관객 1천만 명을 훨씬 뛰어넘은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 황정민 정우성 주연)의 열기가 아주 뜨거웠다. 한 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영화 <서울의 봄>의 열기, 그리고 윤석열의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내란죄)가 45년 세월의 강을 뛰어넘어 내 조국 자유 대한민국에서 괴이하게 하나로 겹치고 있다.
내 마음 속에 여전히 ‘나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는 두 분이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아버지를 따라가 당시 40대의 정치인 김대중, 박정희와 치열하게 맞서 싸우던 김대중의 우렁찬 대중 연설을 들으면서 어린 마음에 ‘연설의 힘’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게 배웠던 기억이 있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을 내 마음에 지금도 ‘선생님’으로 간직하여 모시고 있다.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였던 두 분에게도 딱 한 가지씩 아쉬운 기억이 있다. 김대중 선생님의 ‘전두환 사면’, 그리고 노무현 선생님의 ‘대북송금 특검 수용’이다. 노 대통령께서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현대 가(家)의 정몽헌 회장이 검찰 수사 도중 투신 자살한 일도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야당의 대표로서 신군부에 의해 사형까지 언도받았던 김대중 선생님이 대통령이 된 뒤 내란 수괴 전두환을 사면해 줌으로써 역사의 중죄인이 호의호식하며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편안하게 자연사한 것이 결국은 내란의 불씨를 되살린 꼴이 되었고 그 불씨가 윤석열 같은 괴물, 과대망상증 환자에게 옮겨 붙으면서 이번 내란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곧 “처벌, 단죄하지 않은 역사”다. 김대중 선생님의 내란 수괴 특별 사면으로 역사의 중죄를 범해도 결국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모범사례(?)를 낳았던 것이고, 그 사실이 이번 내란 수괴에게 아주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한 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진지하게 물었다. “과거가 현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 작가의 그 질문에 대한 선명한 대답이 어쩌면 이번 12.3 내란사태의 실패로 주어졌을 것이다. 계엄 해제 후 여태껏 진행된 수사결과로 나온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윤석열 일당의 내란 도모는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치밀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튀르키예 출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쿠데타 학’을 공부하고 있는 어느 기자는 “그 정도 준비했으면 당연히 성공했어야 할 내란이 실패한 것은 앞으로 쿠데타학 교과서에 실어놓고 연구해야 할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했다. 연구하고 말 것도 없이 내가 생각하는 12.3. 내란 실패의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SNS(핸드폰)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한 언론 통제 실패, 둘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학습 효과다. 1980년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키고 언론을 장악하여 통제함으로써 내란사태의 보안이 상당기간 유지되었고 그것이 내란 성공의 주요 원인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마자 시민들이 국회를 지키러 달려 나갔던 것도 SNS(손전화기, 1인 미디어)의 발달 때문이었다. 아울러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마침내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을 잡아 가둠으로써 “성공한 쿠데타일지라도 주동자들은 결국 처벌 받는다”는 것을 모두(특히 군인들)가 학습하였기에 국회에 출동했던 특수부대 요원들이 적극적으로 명(命)을 받들지 못하게 했고 그 틈을 타서 국회가 “계엄해제”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강 작가의 말대로 과거(1980년)가 현재를, 죽은 자(광주의 민주화 영령들)가 산 자를 살려낸 것이다. 이번 내란 소동으로 이 땅의 1030 세대가 일어나 광장에서 K-시위, K-민주를 몸으로 학습한 것이 앞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에 아주 큰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 안타깝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감격으로 여겨 자위한다.
정아은 작가(1975~2024. 12.)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기록”작업을 꾸준히 해 온 다큐멘터리 작가다. 일방적인 편견 혹은 선입견을 철저히 배제하고 관련자들과의 치밀한 면담을 포함하여 역사 속 모든 자료를 철저히 분석하여 매우 객관적인 역사의 상황을 복원하는 데 애를 써온 정직한 작가다. 그러면서도 여느 작가보다도 글이 깔끔하고 매끄러워 가독성이 매우 높은 글을 쓴다. 이 책 <전두환의 마지막 33년>도 그런 수고의 귀한 열매다. 한국 현대사의 “돌연변이”(책 30쪽)이자 괴물, 정치군인 전두환의 삶 전반을 그의 어린 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억”을 힘껏 돕는다. 이번 윤석열 일당의 내란처럼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언제든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그 되풀이 속에서 애꿎은 민초(民草)들만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추운 날씨에 응원봉을 챙겨 숨 가쁘게 역사의 남태령을 기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책의 한 대목(80-81쪽)을 직접 인용한다:
“계엄령 선포 뒤 세상은 조용해졌다… 단 한 곳, 광주는 예외였다. 5월 17일 밤 11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검거 대상자 체포가 시작되었다. 군화를 신은 공수부대원들이 시내 곳곳 가정집 안방으로 들어가 짐승처럼 사람을 끌고 갔다. 그렇게 공수부대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대검으로 몸을 그어 피를 뿌리고, 화염방사기를 쏘아 사람을 태워 죽였다. 5월 21일에는 상공에서 헬기로 기총사격을 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위 군중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거리는 시민들과 공수부대, 경찰, 부상자를 나르는 택시 기사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사태가 악화되고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하자 시위대는 무기와 탄약을 확보했다. ‘시민군’이 탄생한 것이다. 고등학생, 예비군복 차림으로 나온 청년층, 대학생, 공사장 인부 등 다양한 시민들이 합세했다. 시민군은 공수부대에 목숨을 잃은 형, 누나, 동생, 친척, 친구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5월 21일 저녁, 계엄군이 광주에서 빠져나가면서 광주를 봉쇄했다. 광주는 고립무원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광주에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었다. 전화 연락도 차단되었다. 6일 동안 \
광주는 시민들의 ‘자치’로 유지되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과 경찰이 다시 광주를 탈환했다. 계엄군의 도청 진입 과정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시민군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광주에 대한 소식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폭도’, ‘용공 세력’을 들먹이는 기사를 내보냈다. 광주의 실상을 입에 올린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다… 국민은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광주의 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이번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내용 그리고 계엄포고령과 아주 판박이 아닌가?)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결의하고 “윤석열 탄핵안”을 힘겹게 가결하여 이 내란의 최종 판단은 이제 헌법재판소를 넘어가 있다. 서너 살 어린아이도 알 만한 이 살벌한 내란 기도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신 나간 극우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이 계속 시대착오적인 자세로 여전히 윤석열과 비상계엄을 지지하며 내란을 선동, 방조하고 있다. 나는 이번 윤석열 탄핵이 이 극우화된 기독교에 대한 탄핵,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라 생각하고 있다. 모쪼록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을 “처벌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로 아주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번 내란죄에 가담한 자들에게는 감형이나 사면이 없이 민주사회의 공정과 상식에 따라 처절한 응징이 뒤따르기를 바란다. 그래야 응원봉을 들고 이 차가운 겨울 광장으로 나온 1030 우리 후배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내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덧: 최근 평소 건강했던 정아은 작가가 “김건희”를 다룬 책의 원고를 탈고했는데 느닷없이 세상을 떴다. 부디 정아은 작가가 내란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란다. 정아은 작가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기독교인들(특히 목사, 장로)이 이 책을 꼭 읽어 보시기를 간곡히 권한다. R.I.P.
이광우(전주열린문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법인이사)
이광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