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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들>, 윌리엄 트레버, 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2023)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십대 중반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말하지 않고서는 내 마음을 드러낼 수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준 영화가 하나 있으니, 바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이다.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보여준 눈빛에는 ‘사랑해’라는 말로는 차마 다 담을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때 난 처음으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식은 언어가 아니라 비언어적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한다”라는 대사가 나오는 영화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처럼 “사랑한다”는 말없이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들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직 언어로만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글들은? 비언어적 방식을 배제하고 오직 언어만 사용해도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법이 있을까? 비유나 묘사조차 사용하지 않고, 그러니까 텍스트로 남기지 않아도 무언가를 드러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글’로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결국 글이란 “쓴다”는 행위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글을 쓴다’라는 말은 사실 ‘글을 지운다’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오늘의 책 원고든, 일기든, 에세이든, 과제든, 설교든, 내가 어떤 글을 쓸 때 최종적으로 남아있는 글의 양보다 지운 글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때로는 조사 하나를, 때로는 단어 하나를, 때로는 문장을, 때로는 글 자체를 지운다. 어디 그뿐인가. 완성된 글을 탈고할 때 또다시 많은 부분을 지운다. 심지어 지우지 않고 남아있는 문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문장의 의미, 내용, 의도는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글을 ‘쓰는’게 아니라 글을 ‘지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기록되지 못하고 지워진 내용들은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언어라는 형태로 남겨진 것들만 의미를 갖고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은 무의미해지는 것일까? 설령 그것이 한때는 형태를 갖추고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비록 언어라는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더라도, 누군가가 썼다 지운 생각과 마음과 감정은 여전히 단어와 단어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글의 여백이다. 그리고 글의 여백이야말로 글이 가진 경이로움이자 글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경지다.
따라서 훌륭한 글이란 인생 명언이나 멋진 문장이 가득한 책이 아니라 여백이 많은 글이다. 정말 전달하고 싶었던 마음들, 차마 적지 못한 말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언어로 표현하면 그 뜻과 의미가 은폐되어버리는 것들을 차마 쓰지 못하고 지워서 생긴 여백들 말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바로 ‘여백’으로 가득한 책이다. 이러한 책은 줄거리나 인물, 문장 같은 것을 인용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이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섬세하게 읽고 느껴야만 한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여백을 읽게 되었을 때, 이 책은 당신에게 한없이 따뜻한 위안과 충만을 줄 것이다.
김윤형 (청년)
김윤형 청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