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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허수경, 문학동네)
연말 연시가 참 지독했다. 사실, 소문, 정보, 예보 모두 참담한 가운데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성경에 골몰하다가도 수시로 들려오는 슬픈 목소리, 화난 목소리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런 때에 독서가 웬 말인가, 기도나 할 것이지, 하고 체면 차리지 않으려다가 부어오르거나 홀쭉해진 거 센 인파를 피해 들어간 서점 유리창가에 서 있자니 비친 모습이 꼭 지친 영혼같이 어려 있었다.
<비행기는 추락하고>(78p) 그리고 <두렵지 않다, 그러나 말하자면 두렵다>(40p)가 수록된 허수경 시인의 복간시집을 떠올렸다.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내 영혼은 무척 지쳐있으나,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무엇을 써야 할 것인지가 새해의 말이 되어야 했다.
불안한 맑은 빛/서성이는 이미 물빛이 된/내 어린 지친 얼굴(<물빛>,85p)
차 안에 앉아 있던 토끼, 씽긋 웃으며 벌건 몸을 가스통에 던진다//폭발하니 토끼야?//그럼!//그러지 말지……//우는 토끼를 달래네/먼바다 거북 눈을 껌벅거리며 연기를 바라보네(<폭발하니 토끼야!>,75p)
이 세계에 있는 어떤 식사가 그렇지 않을까요/풀을 불러놓고 풀을 먹고/추억을 불러놓고 추억을 같이 먹고/미움을 불러놓고 미움을 같이 먹었더랬지요//우리는 언제나 그랬지요/이 세께에 있는 공허한 모든 식사가 그랬지요(<우리들의 저녁식사>, 77p)
허수경 시인은 시인이자 고고학자로서 독일에서 거주하며 유적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오래된 유물이 있는 동네들에 사는 오늘날 사람들의 초라함, 비천함, 잔혹함을 바라보았다. 시리아, 터키의 난민들, 폭도들, 폭정과 폭력들, 고아들을 보면서 2001년에 낸 시집을 복간한 시집을 읽으면서 그래, 그 때부터 그랬지, 세상은 단 한 번도 고요한 적이 없었어, 라고 중얼거렸다. <물빛> 속의 ‘어린 지친 얼굴’과 <폭발하니 토끼야>의 ‘폭발하는 토끼’를 비롯해, 토끼를 불러 다 토끼고기를 먹는 세상의 잔인함을 그려내는 그의 시는 꾸준히 악몽같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해초를 다듬으며 조개를 까며 아이들은 찬송가를 부른다 이모님 다섯 분이다 지금은 발전소가 멀리 보이는 해변에 앉아, 그때 아이인 이모님들은 발전소가 40년 뒤에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찬송가를 부른다(중략)//다섯 아이들 모두 자망자망 꿈으로 들어가고 찬송가만 그 바다에 남아 그 바다에 가면 들려오지요 그 바다에 가면 들려오지요(모르고 모르고, 67p)
그래도 그 와중에 뻐근한 명치를 두드린 것은 자망자망 꿈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이 부르던 찬송가 소리가 남아 있는 바닷가를 상상해 보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다양한 인종, 종교들 틈을 헤매며 헤집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참상들 속에서 남겨진 것은 오로지 영혼이었음을, 시인은 보았던 것이다.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 나,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나, 그러나 영혼을 믿는 나, 기억들이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을 늙은 늑대 같은 외투를 입고 내 영혼은 멍하게 지켜보리라(<늙은 들개 같은 외투를 입고>,13p)
누군들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22p)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중략) ... 둥근 나귀의 눈망울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23p)
우리는 영혼을 보아야 한다. 세상의 갖가지 참상들 가운데서 오로지 남는 것은 영혼뿐이다.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아픔과 분노와 슬픔 자체가 아니라, 사건이 아니라, 현상이 아니라 본질인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시인이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영혼은 바꿔말하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영혼’이다. 유물과 유적에서부터 시작해 현장까지 이어지는 사람의 영혼, 영혼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품어낸 영혼의 유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허수경 시인의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라는 미완결의 말은 감탄사도 한숨도 아니고 오롯이 많은 영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깊어지고 싶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달래는 말이다.
나 또한 요즘 같으면 오래된 영혼을 달고 사는 기분이다. 우는 영혼들, 아파하는 영혼들의 소식이 너무 선명해서, 그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서 더욱 무겁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오래된 영혼이라 나는 이것을 주님께 의탁하기로 한다. 그리고 오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중이므로, 뜯자마자 바로 낡아버리는 잔인한 세상이라도 영혼만은, 오래되었으나 새로워지는 중이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날로 새로워지고 있으며. 이것 외에 어떤 상냥한 위로가 있겠는가. 위로받지 못하고 떠난 허수경 시인을 비롯해 지금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우리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날마다 새로워지는 중이라는 당부로 새 해 인사를 보냈다. 여전히 욱씬거리는 심장은 무거워도 새벽기도 가는 발걸음은 조금 힘찼다. (덧붙여 개인적으로는 이 시집을 뒤에서부터 읽기를 추천한다.)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
박창수 인천 성은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