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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용남 목사를 떠나보내며

기사승인 2023.11.26  22:30:04

이정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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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용남 목사를 떠나보내며

 

한 사람이 세상에 오는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것 또한 그보다 작지 않다. 출생 시는 그가 이룰 일들을 가늠하여 그리 말하지만 떠날 때는 이룬 삶의 족적을 갖고 말하기에 죽음의 무게가 달리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화려한 죽음이 있고 초라한 죽음이 있을 것인가? 탄생이 그렇듯 자신의 육신을 벗는 죽음 역시 분별이 있을 수 없다. 흔히 말하듯 모두가 죽어 우리를 비추는 하늘의 별이 된 까닭이다. 소수일지라도 그의 삶을 강력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의 죽음은 가볍지 않을 것이다.

 

1.

추용남 목사 그는 평생 쉽지 않은 길을 찾아다녔다. 소수 대형교회 목사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그럴 것이지만 그래도 달랐던 것은 이런 삶이 그의 신앙이자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억지로 그리하지 않았음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안다. 예수 말씀처럼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삶이 그의 목회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편한 길과 힘든 길, 둘 중에서 선택하라면 그는 항시 후자를 수용하곤 했다. 목회 초년 시절 그는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어려운 농촌 교우들을 돌봤다. 미국 서의 목회는 힘겹게 생활하는 유학생들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는 일로 시작했다. 독일의 경우 오랜 이민 생활로 상처받은 이들을 돌보고자 정작 그는 자신과 가족을 돌볼 여지가 없었다. 독일 한인교회에서 자신의 목회를 마무리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귀국을 택했다.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힘든 목회로 사랑하는 아내가 병을 얻었기에 그 일로 교회의 짐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귀국 후 정작 본인이 병을 얻어 우리와 이별할 줄 그도 우리도 생각하지 못했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무거운 짐을 떠맡아야 할 아내에 대한 걱정을 임종 직전까지 몇 차례 내게 토로한 바 있다.

 

2.

나는 추용남 목사를 유학 직후인 30대 초반 우성교회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20대 후반이었고 아들 재헌이를 낳은 상태로 신학교를 다니며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교수와 학생, 담임목사와 전도사의 관계로 만났으니 역지사지해보면 그에게 나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오래전에 스치듯 내게 했던 말 때문이다. 나를 선생이 아니라 형이라 부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어려운 관계로 만났지만 ‘곁’으로 남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고마웠으나 명확하게 답하지 못했다. 추용남 목사가 강릉의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임종 일주일 전쯤이었다. 너무도 야윈 모습에 그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을 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형이라 불러 주었다. ‘형 그간 고마웠다’며 울먹였다. 그것이 내가 그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이 되었다. 지금도 그 말이 계속 들리는 듯하다. 내가 더 고맙고 배운 것이 많았는데 그 말을 되돌려 들려주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렇기에 그가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한동안 둘만의 카톡방에서 그와 나눈 대화의 길이가 얼마나 길고 많았는데 말이다.

 

3.

추용남 목사 그는 울음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이점에서 그와 나는 닮았다. 마음에 작은 ‘터치’만 있어도 그는 감격했고 좋아했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동시에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컸다. 돌아온 이 땅의 현실을 아픈 몸으로도 걱정했고 글과 말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동시에 그는 배움에 목마른 사람이기도 했다. 간혹 무슨 책을 소개하면 즉시로 구입해서 읽었고 독서 후기를 나누곤 했다. 조금만 길게 살았더라면 그는 작은 서점을 내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독서 모임을 이끌고자 했을 것이다. 적은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머리는 녹슬지 않았고 그의 심장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딸 은지의 페미니즘 도전을 버거워하면서 수용하려고 했다. 매달 한 번씩 평창 방림면에서 열리는 다석 공부 모임에도 운전하여 온 적이 있었다. 허약해진 몸 상태로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그의 책 사랑과 배움의 열정은 죽음도 막지 못할 만큼 컸다. 우리 주변에 이런 영혼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를 잃고서도 허전하고 빈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잘못 살았던 것이리라.

 

4.

추용남 목사는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재헌과 은지 두 남매를 세상에 남기고 떠났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일생이 담긴 설교집 <<죽음이 현실이되는 순간에도(신앙과 지성사 2022)>>를 주변 사람들에게 남겨주었다. 이은선 교수가 열과 성을 다하여 서평을 썼다. 내가 부추긴 측면도 있으나 그도 역시 나름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알려진 목회자는 아니었으나 입소문을 타고 알려져 이 책은 제법 많은 이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본인으로서는 한 사람에게 라도 더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장례식 영전에 놓였던 위 책을 보며 책 출판을 도왔던 친구들 얼굴이 생각났다. 모두가 십시일반 마음 모아 추용남 목사의 뜻을 이뤄 준 것이다. 지금껏 이 책과 인연 맺지 못했다면 단숨에 읽어 주길 권유하고 싶다. 그를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들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두 남매가 육의 열매라면 이 책은 영적인 열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나는 추용남 목사의 설교를 종종 귀 기울여 듣곤 했다. 목소리 톤이 밝지는 않으나 정성껏 준비한 설교를 탄복하며 들은 경험이 제법 있다. 정말 성심껏 가식 없이 설교를 준비했고 토로했다. 내용도 풍부했고 설득력도 컸다. 그런 그가 임종을 눈앞에 두고 평생에 걸쳐 행했던 설교 문 일천여 편을 정리해 놓았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설교가 곧 자기 인생이었음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가족을 위해 돈 한 푼 남겨 놓지 못했다. 천여 편의 설교가 그의 모든 것이 되었다. 설교밖에는 남겨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가 제일 좋아했던 말이 ‘제소리’였다. 내게서 배운 다석 사상을 좋아했기에 그의 설교는 언제든 자기 소리로 전해졌다. 발인예배를 인도하며 나는 모인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그의 유고 설교를 땅에 묻지 말기를 말이다.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천여 편의 설교만큼 어마어마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것이 제소리로 울려 퍼졌다면 말이다. 그의 사후 1년, 혹은 2년 되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앞의 책 후속편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싶다.

 

6.

호스피스 병동에서 12월로 초중순 경으로 예정된 아들의 결혼식까지 버텨주기를 기도했는데 내 기도가 부질없는 말이 되어 버렸다. 혼사를 내년 봄으로 미뤘다는 사려 깊은 말이 전해졌다. 잘한 일이다. 며느리로서 새 식구 될 여인을 장례식장에서 보았다. 어질고 착한 여인이 추용남 목사를 대신하여 새 식구가 되었으니 마음이 놓인다. 신학을 공부한 두 자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버지로서 추용남 목사 역시 욥처럼 하늘에 항변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마지막 순간 그가 꿨던 꿈이 이를 말하지 않는가? 하늘이 내린 세마포로 그의 온 몸이 감싸졌다는 임종 직전의 꿈 이야기 말이다. 하늘이 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징표라 생각한다. 이렇듯 하늘이 아버지를 품었으니 그의 영혼은 한없이 복될 것이다. 자녀들 역시 흔들리되 넘어지지 않기를 아버지도 바랄 것인바 굳세지길 기도한다. 어버지 없이 아버지 앞에서 사(서)는 것이 우리의 신앙 실존인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지금도 궁금한 점은 음치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잘하는 두 남매가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부정확한 음으로 교인들 찬송을 힘겹게 지도하던 추용남 목사를 떠올리며- 아마도 영일교회 부담임 시절로 기억하는바- 슬프지만 웃고 싶다.

 

 

 

2023년 11월 26일 주일 오후

횡성 顯藏 아카데미에서

이정배 씀

 

   
 

 

                         < 고, 추용남 목사 약력 >
 

 - 1960,  6,  17  : 서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 1979          : 서울 대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강남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 1985          ; 감리교 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 1989, 10      : 나주 영산포에서 ‘다운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시작하여
                   광주 사도교회, 강릉 초당교회, 서초지방 영일교회를 섬기다가 
 - 2007          : 미국으로 건너가 풀러 신학대학에서 수학하였습니다.

 - 2009 ~ 2012  : 미, 동부 메인주에 있는 ‘메인제일교회’ 섬겼고,                   
 - 2013         : 독일 ‘기독교 복흠한인교회’를 섬기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독일에서 사역하던 중 ‘재독한인 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셨고, 
                  유럽 최초의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 2019          : 독일 ‘기독교 복흠한인교회’를 사임한 후,
                  15년간의 순례의 삶을 정리하고 속초에 정착하였고, 암투병의 
                  고통 가운데서도 ‘죽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에도’라는 책을 출간하여,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일깨워 주기도 했습니다.

                  추용남 목사님은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목회자였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며 불의한 현실에 대해 
                  분노할 줄 아는 예언자의 성품을 지닌 목회자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증인으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설교자였습니다. 
 
- 2023, 11, 19, 22시 52분경 사랑하는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이은숙 사모님 사이에 추재헌, 추은지 1남1녀를 두셨습니다.
 
                   
                        
 

 

 

이정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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