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변신‧선고 외>, 프란츠 카프카, 김태환 옮김, 을유문화사, 2015)
독일에 오고 난 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문제는 ‘정체성’이다. 한국에서 ‘나’는 ‘한국인(주류)’, ‘남성’, ‘기독교인’, ‘신학생’, ‘전도사’라는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신학생’도 ‘전도사’도 아니면서 ‘외국인(소수자, 비주류)’이 되었다.
한순간에 나를 구성하던 정체성들이 바뀌거나 사라지자 수많은 혼란을 겪게 되었다. 정체성의 혼란은 감정과 행동의 혼란으로 이어졌고, 내 안에서는 늘 ‘나는 누구인가?’, ‘독일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하는 고민들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 한 작가가 떠올랐다.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소설을 쓴 사람, 바로 프란츠 카프카다. 나는 오랜만에 다시 카프카의 소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다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들을 읽다 보니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극도의 불안감’이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카프카의 작품 속에서 외롭고, 공허하고, 우울한 분위기만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그 모든 감정과 분위기를 압도하는 ‘불안’을 느꼈다. 나는 ‘카프카적인(kafkaesk)’ 모든 것이 바로 이 ‘불안’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불안했던 것인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가 프라하에서 유대인이라는 소수자로 살았기 때문인가? 나치 독일 지배 아래에 있던 체코에서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작품을 썼기 때문인가? 권위적인 아버지 때문인가?
이러한 환경은 분명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가 느낀 불안의 원인은 그보다 근원적인 것에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 앞에서>와 <시골 의사>. 이 두 개의 단편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법 앞에서>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한 시골 남자가 법(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법 앞을 지키는 문지기는 그를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지기는 시골 남자가 나중에는 법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설령 그가 자신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법 안으로 들어가도 그 안에는 더 강한 문지기들이 존재한다고 경고한다. 시골 남자는 문지기가 허락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묻는다. “모든 사람이 법을 추구하는데, 어째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나 말고 입장을 요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가?”(법 앞에서 – p.142)
그러자 문지기가 외친다. “여기서는 너 외에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너만 들어가도록 정해진 입구였거든. 난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지”(법 앞에서 –p.142)
<시골 의사>에서는 한 시골의사가 한밤중에 자기 집에서 1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중환자의 호출을 받는다. 그는 환자 집으로 진료하러 가지만, 그 과정에서 수상한 괴한에게 하녀를 잃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환자를 구원하지도 못하고 “나는 끝내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번창하는 내 진료소는 망했다”(시골의사-p.134)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외친다.
“속았다! 속았어! 한 번 잘못 울린 야간 벨 소리에 따라나섰다가 – 다시는 되돌릴 수 없구나.”(시골의사-p.134)
<법 앞에서>의 시골 남자도, <시골 의사>의 시골 의사도 모두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속았다. 그리고 “속았다! 속았어!”라고 외치는 순간, 카프카적인 모든 불안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며 믿어왔던 자기 자신과 타인과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묻는다.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Was ist mit mir geschehen?”) (변신-p.23)
이처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은 자는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비극은 더욱 커진다. 왜냐하면 타인과 세계는 여전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타인과 세계는 갑자기 변해버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속은 것을 알아차린 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자신도, 타인도, 세계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타인과 세계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게 된 자는 스스로를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린다.-<변신>
사람들은 벌레로 변해버린 그를 더욱 역겨워하고 혐오하고 미워한다. 그래서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아버지는 그레고르 잠자에게 사과를 던지며 여동생은 “우린 저걸 없애 버릴 방법을 찾아야 해요”(변신-p.81)라고 말한다.
따라서 속았음을 깨달은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해하며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증명하거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카프카의 장편소설들은 바로 이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소송>에서 주인공 요제프 K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성에서 주인공 K는 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실패로 끝난다. 성의 주인공 K는 결국 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소송의 요제프 K는 유죄 판결을 받고 죽는다. 그러므로 나는 카프카의 모든 작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극심한 불안을 겪다가 결국 절망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
(이러한 맥락에서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던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카프카의 작품과 딱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진실을 깨달아서는 안 되는가? 아니면 진실을 깨달아도 모른 척 연기를 하며 살아야 하는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이 물음들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히 다시 보게 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에 살던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켜 권력구조를 바꾸고자 한다. 그들의 목표는 머리칸에 도달하여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하고 꼬리칸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남궁민수(송강호 역)와 요나(고아성 역)만 제외하고. 결말에 다다랐을 때, 남궁민수는 자신의 목표는 엔진을 장악하거나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앞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벽이라고 생각했던 옆문을 열고 아예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남궁민수의 이 말이 카프카와 키에르케고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라는 기차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한,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차 내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옆문을 열고 기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옆문을 열고 나가야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카프카적인 불안과 절망은 비참함에서 희망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불안과 절망을 겪은 자만이 앞문이 아닌 옆문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김윤형 (청년)
김윤형 청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