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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용(The Dragons of Eden)” 창세기3장1절~8절

기사승인 2024.02.26  22:02:03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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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용(The Dragons of Eden)” 창세기3장1절~8절

 

 

1.사단(Satan)의 유혹

 

① (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본장은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 존 밀턴 1667)의 원인담(原因談, Etiology)이다. 본문은 기쁨의 동산을 빼앗는 존재를 적시하고 폭로한다. 에덴의 뱀은 오늘 우리가 보는 모습과 사뭇 다르다. 직립보행을 하며 언어도 구사하는 마치 ‘에덴의 용(The Dragons of Eden, 칼 세이건 1977)’과 같은 신원미상의 존재다. 뱀은 전통적으로 사단을 상징하는 은유(metaphor)다. 사단은 라틴어로 ‘Satanas’ 영어로 ‘Satan’인데 하나님의 통치를 훼방하는 영적인 대적을 통칭한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듯 사단도 말로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미혹한다. 사단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 91:11)” 단편적인 요절 신앙은 성경을 오남용(misuse) 하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본래적인 메시지를 왜곡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다. 날개가 있다고 모두 천사가 아니듯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때문에 말이나 직분이 아니라 열매로 나무를 아는 분별력이 요구된다. 사단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앞세워 드높이게 한다.

 

② (2절~3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사단의 유혹(temptation)과 하나님의 시험(test)을 구별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하나님의 시험은 징계를 통한 훈련과 연단으로, 그 목적이 믿음의 성숙에 있다. 이와 달리 사단의 유혹은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고 타락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주목할 점은 사단의 유혹이 벌어진 장소가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동산이라는 사실이다. 뱀의 유혹이 에덴에서 벌어지듯 사단의 유혹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 위에서도 벌어진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주의 일을 하다가 미혹에 빠지게 한다. 사단의 유혹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는 이들도 예외 없이 유혹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답을 한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는 말씀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잘못된 해석이 원인이다. 유사 이래 모든 이단 사설들이 성경을 오남용하고 곡해함으로 비롯된 것과 같다.

 

③ (4절~5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사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한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단언한다. 사단은 진리의 말씀을 거짓으로 대적하고 하나님이 언약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말로 훼방한다. 성경이 전하는 소위 영적 전쟁은 칼이 아니라 말로 싸우는 전쟁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유일한 차이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금단(禁斷)의 영역이자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의 상징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사단의 유혹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교만을 활용한다. 선악에 대한 최종적인 판가름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오만을 부추겨서 청지기가 주인 노릇하고 피조물이 창조주 행세를 하게 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롬 2:1~5)” 하나님을 경외하면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고 비난하기보다 도리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는다. 사람의 평판과 판단은 부정확하고 변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고 한결같기 때문이다. 이는 최종적인 결재권을 하나님께 두고 심판을 유보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지혜다. 거짓의 영인 사단은 중상모략과 이간질로 편당심을 일으켜 상호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관계를 단절시킨다.

 

 

2. 원죄(原罪, 오리지널 씬, Original Sin)

 

①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하나님의 명하신 금단의 열매를 범한 사건을 가리켜 일명 ‘원죄(原罪, Original Sin)’라고 부른다. 초대 교부들로부터 전승된 원죄는 죄의 기원과 뿌리를 의미한다. 원죄, 곧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불순종이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살인, 도적질, 거짓말 등으로 한정하고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했다. 이와 달리 바울은 성령을 좇지 않고 욕심을 좇는 삶을 죄로 규정했다. 성경이 시종여일하게 전하는 죄의 본질은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상황 따라 형편 따라 사는 삶이다. 본문은 죄의 동기를 더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먹음직도 하고’ 육신의 정욕이고, ‘보암직도 하고’ 안목의 정욕이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은 이생의 자랑에 해당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원죄를 주창한 까닭은 시공을 넘어 죄악이 뿌리 깊게 우리 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죄악의 무서움은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확장성이다. 공동구매로 물건을 싸게 사듯 죄를 공모하면 무거운 죄가 가볍게 되는 줄로 착각한다. 하지만 도리어 죄악이 관영해져서 공멸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삶은 반드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자녀와 후손이 보고 배운다. 믿음의 선배와 교회 지도자에게 선한 영향력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②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 (메시지성경) ‘그러자 그 두 사람은 곧바로 실상을 보게 되었다. 자신들의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임시로 몸을 가렸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죽지 않고 오히려 눈이 밝아졌다.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지식이 더 유익할까? ‘아는 게 병’이라는 격언처럼 아는 것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도리어 아는 것이 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셰익스피어의 명언처럼 유한한 인간에게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인 까닭이다. 그 실례가 인류가 발견한 제3의 불이라고 일컫는 원자력(nuclear energy)이다. 핵분열과 핵융합은 일명 꺼지지 않는 불이다.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가진 핵무기와 핵 발전이 도리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재물!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큰 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다.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넘지 말아야할 선(guideline)을 지키는 과유불급의 지혜다.

 

 

3. 영적인 죽음과 영원한 생명

 

① (8절)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 뱀의 말대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살았으나 영은 죽었다. 사데 교회처럼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계 3:1)’로 전락했다. 대부분의 경우 죽음을 뱀의 말처럼 생사 여부로 가늠한다. 하지만 죽음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생물학적 죽음’이다. 생물학적 죽음은 세상과의 단절, 즉 사별(死別)이다. 둘째 ‘사회적 죽음’이다. 사회적 죽음은 인간관계의 단절, 즉 소외(疏外)다. 소외는 단순한 따돌림을 넘어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상태를 말한다. 셋째 ‘영적인 죽음’이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단절(斷絕)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삶이 영적인 죽음이다. (메시지성경) ‘저녁 산들바람 속에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와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영적 죽음의 결과는 은혜와 사랑, 감사와 기쁨, 의미와 보람의 상실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무감각, 무감동,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통찰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죽음이 관계의 단절이라면 삶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삶이 영적인 죽음 곧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에 이르게 했다면, 복낙원(復樂園, Paradise Regained)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삶에 달려있다. 생명(Life)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이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영생(永生, eternal life)’이라 부른다. 영생은 이교도들의 말대로 영원히 죽지 않고 목숨을 연명하는 불로불사(不老不死)가 아니다. 성경이 전하는 영생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이다. 영생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불멸하는 가치,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사는 삶이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의 가사 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관계를 날마다 만끽하는 삶이다. “참되고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욕심에 이끌려 죄 가운데 살던 삶에서 벗어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좇아 사는 참된 삶이 영생이다.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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