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전 한차례 예초를 마쳤다. 콩과 들깨 이랑 사이로 누워있는 풀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매우 시원하였다. 중간에 삐져나와 있는 풀들이 보여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몇 날 걸려 수고한 것에 비하면 그 정도의 아쉬움은 봐줄 만하다. 그렇게 하여 맞이한 거친 장맛비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이쪽 훈련원은 다행히 유월 장마의 무서움을 피해 갔다. 작년에 휩쓸고 간 수마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하고 매해 그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장마를 대비해 작년에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을 다시 살폈다. 배수로 근처의 풀을 예초하고 물이 유입되는 배관 근처를 시멘트로 개어 꼼꼼히 발라 흙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비가 오는 중간중간 배수로가 막히지 않았는지 살폈다. 그렇게 하여 한차례 고비를 넘겼다.
장맛비는 제철인 양 이주 간 온 지면에 쏟아냈다. 집 앞 건천은 밤새 내린 비로 거친 물살을 만들어 그곳에 쌓여있었던 지난해의 낙엽들을 몽땅 쓸어갔다. 어디로 어떻게 흘러 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깨끗해졌다. 그리고 개천 바닥을 맑은 물로 채웠는데 바닥이 커다란 바위다. 덕분에 요즘 그곳에서 어릴 적 가족들과 피서갔던 영월 용석리 강가를 추억한다. 물안경을 쓰고 잠수했던 기억, 어항에 잡힌 물고기로 매운탕을 해 먹었던 기억, 미적지근한 참외와 수박을 먹던 기억, 귀에 들어간 물을 빼려고 뜨거운 돌을 귀에 대고 있다가 데인 기억 등을 떠올리며 쓸쓸히 웃었다. 가족은 모두 떠났고 이젠 나 혼자 집 앞 물가에서 발을 담그고 놀고 있다. 갓 뜯은 상추를 씻고, 복숭아와 토마토를 씻고, 비누칠하지 않은 옷을 빨래한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멱뿐 아니라 몸을 담가 물놀이를 즐겼으리라. 이제 곧 마를 것을 생각하니 흘러가는 물들이 아쉽고 아까웠다. 그래서 물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한다.
엊그제 밭을 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콩이 제법 자랐다. 비 오기 전 부리나케 보식했던 콩도 자리를 잡아 크고 있었다. 밭 아래쪽 콩은 흙이 고아서 그런지 거의 100센티 이상 자랐고 벌써 꽃도 피우고 있었다. 더 많은 콩을 맺게 할 요령으로 하는 순치기는 물 건너갔다. 간간이 눈에 띄는 노린재를 잡았다. 순치기도 못했는데 이제 막 맺히는 꼬투리에 노린재의 공격을 이번만큼은 지키고 싶다. 매해 노린재의 역습에 속수무책이었는데 올해는 보이는대로 족족 잡아 콩을 지켜내리라. 벌써 교미를 시작하는 놈도 있었다. 요때다 싶어 손을 날래 뻗어 잡아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그리고 지그시 밟는다.
어째 풀의 생명력은 이렇게 강할까? 뿌리째 뽑아도 뒤돌아서면 올라와 있다. 그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다녀간 것이 분명하다. 또 위장의 천재이기도 하다. 깨밭엔 깨와 비슷한 풀이, 콩밭엔 콩과 비슷한 콩이 카멜레온처럼 자란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 작물인지 풀인지 구별하지 못하여 같이 키우기도 했다. 이젠 구별을 할 수 있다. 설령 초반에 구별이 안된다 해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을 뽑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 자라면 그때야 뽑아내든지 베어내든지 한다. 풀을 베는 것도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면 풀은 작물보다 더 싱싱하고 건강하게 그야말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하게 자라나 작물의 자람을 해친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하게 자라기 근처까지 온 풀은 나의 낫을 기다리고 있었다.
엊그제 주일 오후, 해가 떨어지고 더위가 가실 시간에 낫을 들고 나섰다. 엄청난 풀의 위력에 눌려 자라기를 멈추려 한 들깨 고랑에 들어섰다. 잘 들지도 않는 낫을 강제로 휘둘러 어찌 하다보니 세 고랑 반을 했다. 장마는 멈췄으나 나의 몸은 이제 장마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겉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날파리가 쉰내를 맡고 눈앞에서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또 계산을 한다. 내일은 네 고랑, 다음날도 네 고랑… 풀은 장마야 어서 오라 하고, 농부는 처서야 어서 오라 한다는 말이 있다. 장맛비에 풀은 쑥쑥 자라고, 처서의 선선함에 풀의 자람이 더뎌진다. 나는 농부다. 처서가 오기 전까지는 줄기차게 풀을 베야 한다. 그야말로 릴레이 예초다. 이번이 두 번째이니 두 바퀴만 더 돌면 풀이 잦아드는 처서가 다가올 것이다. 그때까지 전력질주하다 보면 낫을 든 내 손도 쉬엄쉬엄 움직일 때가 오리라.
황은경 hallofreund@naver.com
